갑을관계 민주화와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대안적 접근

노동사회

갑을관계 민주화와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대안적 접근

구도희 0 6,613 2013.07.05 01:59

최근 ‘갑의 횡포’에 대한 사회적 분노가 상당하다. 이것은 일시적 현상일까 아니면 지속적 현상일까? 그리고 이러한 사회적 현상의 원인은 무엇일까? 하나의 사회적 현상을 접하면 그러한 현상의 원인과 동력을 이해해야만 향후 추세를 정확히 고찰하고 전망할 수 있다. 흔히 정세분석이라고 부르던 부분이다. 이러한 객관적 상황판단을 전제로 할 때 균형감각을 갖춘 실천적 개입 지점을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서 새로운 국면을 주도적으로 조성할 수 있다.

 

경제민주화 담론 확산의 진정한 추진 동력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 담론이 여야를 막론하고 경쟁적으로 횡행했다. 심지어 대한민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동네인 대구・경북 출신인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이 되었음에도 이러한 대세를 거역하지 못할 정도다. 도대체 경제민주화 담론의 동력은 무엇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경제민주화 담론이 확산되는 동력은 ‘자영업자’다. 왜 하필 자영업자란 말인가?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1997년 IMF 구제금융 이후 노동시장에서 퇴출된 노동자들은 노동시장 바깥의 자영업자가 되었다. 이로 인해 자영업 시장은 구조적인 과잉경쟁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IMF 이전’에는 소득이 △자영업자 △정규직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 순이었다. 그러나 ‘IMF 이후, 200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상황은 완전히 역전된다. △정규직 노동자 △자영업자 △비정규직 노동자의 순서가 되었다. 노동자 대비 자영업자의 지위는 하락했다.

둘째, 2000년대 이후 대기업이 가장 두드러지게 진출한 분야는 ‘유통’과 ‘물류’다. 노동시장을 벗어나 자영업자가 된 이들은 다시 ‘대기업’과 마주하게 된 셈이다. 요컨대, 자영업자들은 노동시장에서 쫓겨난 이후, 노동3권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서도 다시 대기업과 경쟁하거나 혹은 가맹점/대리점의 형태로 대기업과 불공정한 갑을관계에 놓이게 된 셈이다. 이들의 실제 처지는 노동자들보다 나은 것이 별로 없다. 게다가 노동권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있다.

 

왜 비정규직이 아니라 자영업자인가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우리는 직관적으로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다. 노동시장의 고용불안-차별-불평등이 가장 심각한 분야는 비정규직이다. 그런데, 갑을관계의 횡포는 사회적 동력이 형성되는 반면, 비정규직 문제는 그렇지 못하다. 일시적으로 ‘반짝’ 사회적 관심이 형성되다가 이내 사라지고 만다. 왜 그럴까?

그것은 정치의 작동 원리와 관련이 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한국의 정치제도가 ‘소선거구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선거구제는 속성상 지역 대표성을 원리로 하는 선거제도이다. 즉, 구의원-시의원-국회의원-구청장 등의 입장에서, 2010년 지방선거와 2012년 총선을 거치면서 선거운동을 통해 자영업자들의 절규를 듣게 되었고, 그것이 정치적으로 투영되고 있는 셈이다. 흔히 ‘골목상권 침해’로 알려진 분야다.

그리고 실제로도 선거의 관점에서 볼 때 자영업자는 매우 영향력 있는 유권자 집단이다. 정치인들이 반응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 비정규직은 주거의 지속성이 불안정할 뿐만 아니라 투표율도 낮은 편이다. 그래서 지역 대표성을 반영하는 정치인의 입장에서 볼 때, 비정규직은 (지역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유권자인 셈이다.

만일, 한국의 선거제도가 네덜란드-스웨덴-이스라엘처럼 전면적 비례대표제를 하는 나라였다면, 자영업자 이슈보다 비정규직 이슈가 훨씬 파급력이 컸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비정규직에 대한 이슈-대안-정책의 생산량 자체가 지금보다 훨씬 많아졌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비정규직 이슈는 계층을 포괄하는 전국단위 대선 이슈일 때만 부상하고 있다. 지방선거-총선의 이슈로는 부상하지 못하고 있다. 최장집 교수 등이 줄곧 지적하는 ‘노동 없는 민주주의’가 지속되는 한 가지 요인이다.

이러한 소선거구제의 문제점에 대한 전통적인 접근은 진보정당의 방식이다. 진보정당은 ‘비례대표제의 확대’를 주장했다. 원론적으로 동의하는 주장이다. 그런데, 문제는 비례대표제의 확대는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점이다. 국민들의 눈높이에서 본다면, 비례대표제의 확대는 통합진보당의 이석기, 김재연 같은 사람들의 의회 진출을 용이하게 해주는 수단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게다가 17대 이전 국회에서 비례대표제는 ‘전(錢)국구’로 불렸다. 과거 창조한국당 비례대표제의 돈 공천 사건에서 보듯, 여전히 비례대표제는 돈(錢) 대표제가 될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다. 때문에 비례대표제 확대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의 확산이 쉽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하나의 제도는 제도 그 자체의 장단점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하나의 제도는 세력-인물에 대한 신뢰와 맞물릴 때 대중적 동력을 형성할 수 있다. 일례로 1987년 6월 항쟁 이전 전두환 신군부는 내각제를 주장했고, 김영삼-김대중의 민주화세력은 직선제를 주장했다. 당시 국민들은 직선제를 주장했는데, 그것은 제도 그 자체의 정합성을 중심으로 판단한 것이 아니라, 김영삼, 김대중으로 대표되는 민주화‘세력’이 주장하는 제도를 지지했던 셈이다.

그렇기에 한국사회에서 ‘실제로’ 비례대표제가 확대되는 것은 매우 장기적인 과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비례대표제가 확대되기 전에 비정규직의 ‘현실’은 어떻게 개선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 요컨대 우리는 비례대표제의 확대는 당분간 쉽지 않다는 것을 객관적 제약조건으로 수용한 상태에서, 그리고 소선거구제라는 정치의 원리를 일단 수용한 상태에서, 비정규직의 처지를 실제로 개선시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실천적 태도이며 서민대중과 비정규직에 대한 책임 있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계층 생태계' 전체를 조망하라

먼저 우리는 한국 사회의 계급-계층 생태계 전체를 조망할 필요가 있다. 그간 한국의 시민사회는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민중운동진영과 정치개혁운동을 중심으로 하는 시민운동진영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비정규직-자영업자 문제를 소홀히 다룬 공통점이 있었다.

한국 사회계층 생태계를 전체적으로 조망해본다면 ‘4층 구조’를 이룬다고 볼 수 있다. 즉, ⑴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 ⑵ 자영업자 ⑶ 비정규직 ⑷ 빈곤층이다. 이들은 각각 번호 순서대로, ⑴이 망하면 ⑵가 되고, ⑵가 망하면 ⑶이 되고, ⑶이 망하면 ⑷가 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

그리고 한 가지 유의할 것은 이중에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와 ‘빈곤층’의 경우 상대적으로 복지정책의 수혜 대상이라는 점이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의 경우 사회복지의 주요 대상자임은 물론 ‘기업복지’에도 포섭되어 있다. 그래서 복지국가와 경제민주화 요구 모두에 대해서 둔감한 편이다. ⑵와 ⑶의 처지로 ‘전락하지 않는 것’이 이들의 최대 관심사이다. 그게 바로 ‘고용안정’ 요구, 즉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형태로 표현되는 요구다. 요컨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해고는 살인이다”라는 슬로건이 역설적으로 압축하고 있듯이, 자영업자-비정규직으로 ‘전락’하는 것이 ‘살인적인’ 상황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진실은 어떤 함의를 갖는가? 자영업자와 비정규직의 처지를 개선하는 것이 ‘계층(계급) 생태계’ 전체의 균형과 연대를 위해서도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영업자와 비정규직은 동시에 ‘복지 사각지대’의 당사자들이기도 하다. 본래 연대란 ‘동질성’이 높아질 때 더 효과적으로 발휘된다. 그렇게 볼 때 자영업자-비정규직의 처지를 ‘끌어올리면’ 계층 전체의 연대는 더 효과적으로 될 가능성이 높다.

 

정규직-비정규직 프레임의 보수성

그런데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전통적 접근은 ‘정규직’ 노동(조합)운동이 주도했다. 그리고 이들은 이념적으로 보자면 전통적인 이념운동(NL-PD) 세력의 자장 안에 있다. 우리가 비정규직 문제를 ‘실제로’ 쟁점화시키는 실천적 개입을 하고자 한다면, 그동안 왜 비정규직 문제는 충분히 정치적 쟁점으로 부상하지 못했는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 간략히 짚어보자. 비정규직 문제가 정치적-정책적 쟁점으로 부상하지 못한 이유는 크게 보면 세 가지다.

첫째, 정규직/비정규직 프레임 자체가 약간은 보수적인 태도에 기반한 프레임이이라는 점이다. 현대 사회의 노동-고용형태는 매우 다양화되었다. 정규직/비정규직 패러다임은 그 논리 구조상 ‘정규직’이 아닌 모든 노동형태는 ‘비정상(非正常)’으로 간주하는 패러다임이다. 그렇다면, 정규직은 정상일까? 왜 정규직은 정상으로 간주할 수 있다 말인가? 정사적인 노동형태로 간주되는 정규직을 역사적으로 조망해보면, 유럽을 기준으로 볼 때 1950년대~70년대에 전형적으로 존재하던 노동 형태이며, 한국으로 치면 대기업-공기업을 중심으로 했던 1997년 이전 종신고용과 연공서열제에 기반한 고용형태를 의미한다.

이러한 프레임에 의하면 비정규직은 모두 비정상이다. 그런데 비정상에 해당하는 노동자 숫자가 정상적 수치에 육박한다는 것은 이미 정상/비정상의 경계를 허무는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의 실제 현실은 정규직이 정상인지, 비정규직이 정상인지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그렇다면 변화된 현실을 그 자체로 인정하고, 새로운 대안적 실천을 모색해야 하는 것 아닐까?

우리는 세계화, 경쟁의 심화, 산업구조가 복잡화가 맞물려서 현대적 고용형태가 복잡-다단-중층화되었다는 점을 어느 정도 인정할 필요가 있는 것 아닐까? 우리가 노동자의 행복을 위해서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목적은 ‘고용형태’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삶을 통해서 겪게 되는 고용 불안-차별의 문제를 실천적으로 해소하고, 노동자의 권리가 더 보장되고 지금보다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다.

 

복잡해지고 다층화된 현실을 직시하라

둘째, 비정규직의 77%가 ‘30인 미만 사업장’에 존재한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정규직은 △5인 미만 사업장에 32.7% △5~9인 사업장에 21.9% △10~29인 사업장에 22.5%가 존재한다. 이러한 현상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간단하다. ‘지불능력’이 없는 소규모 기업이 비정규직을 고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표1] 참조.) 그렇게 볼 때,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구호는 일부의 경우에는 타당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매우 공허한 주장이다. 사실상 어느 정도는 ‘실현 불가능한’ 요구를 그간 했던 셈이다. 그리고 진보정당의 일부 정치인들이 한때 주장했던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지원금 제도’ 역시도 실천적으로 매우 무기력한 대안일 수밖에 없다. 의도와 무관하게 생색내기용 대안을 벗어날 수 없었던 셈이다. 

셋째, 복잡하고 다층화된 현대적 노동시장에는 정규직-자영업자-파트너십-갑을관계-비정규직의 성격이 뒤죽박죽 혼재되어 있다. 그럼에도 전통적인 노동조합운동은 노동3권에 기반한 ‘전통적-고전적 노동시장’의 형태만을 고집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외의 노동시장 형태에 대해서는 ‘비정상’으로 간주하며 존재 자체를 부정하려는 접근을 했던 것은 아닐까? 예컨대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자성 인정’이라는 주장도 이에 해당한다. 특수고용노동자는 노동자의 성격, 갑을 관계의 성격, 자영업자의 성격이 혼재되어 있다. 그런데 전통적 접근은 자영업자의 특성은 무시한 채, 노동자성의 인정만을 요구한 셈이다. 이러한 접근이 정말로 특수고용노동자들의 처지를 실제로 개선시킬 수 있는 것인지 우리는 비판적 접근을 할 필요가 있다.

 

‘갑을관계’ 지렛대로 비정규직의 대항력 형성

앞에서 살펴봤던 내용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사회의 양극화에 가장 적나라하게 노출된 양대 계층은 자영업자와 비정규직이다. 둘째, 소선거구제의 특성상, 자영업자 이슈는 사회적 동력을 확보하기 쉬운 데 반해, 비정규직 이슈는 사회적 동력을 형성하기 어렵다. 셋째, 비례대표제의 확대는 ‘중장기적’ 과제이기 때문에 실천적으로 볼 때, 소선거구제의 특성을 인정하고, 자영업자 이슈가 사회적 동력 형성에 용이하다는 점을 객관적 제약조건으로 인정한 상태에서, 별도의 대안적 접근이 필요하다. 넷째, 비정규직의 실태는 기업규모 차원에서 볼 때, 30인 미만 사업장이 77%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꺼번에’ 정규직화를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비정규직-특수고용-자영업자-갑을관계의 성격이 혼재된 상태를 인정한 상태에서 ‘점진적인’ 개선을 목표로 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자영업자-갑을관계 성격을 ‘지렛대 삼아’ 사회적 이슈의 동력을 형성하면서 비정규직 문제를 접근하는 방법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개념적으로 구분할 때, 노동법을 통한 비정규직 문제의 접근을 포함하되, 경제법과 사회보장법 등의 영역을 실제의 현실에 맞게 종합적으로 활용하며 접근하는 개방적인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의 고용형태별 실태를 보면, 호출근로 84만 7천 명, 용역근로 65만 5천 명, 특수고용 58만 4천 명, 파견근로 19만 명, 가내근로 7만 9천 명이다. 이들을 합치면 235만 5천 명에 달한다. 즉, 약 235만 5천 명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경우, 자영업자-갑을관계의 성격이 혼재하고 있기 때문에 ‘갑을관계’ 이슈를 매개로 사업자단체의 결성 및 협의권을 제도화하고, 실질적인 단체교섭을 통해서 ‘대항력’을 형성할 수 있는 여지가 존재한다.

 

노동법만으로는 노동 있는 민주주의 어려워

한국사회에서 비정규직은 사회면의 기사에 간혹 등장할 뿐이다. 혹은 비정규직 투쟁이 발생할 경우 일시적으로 이슈화가 이뤄질 뿐이다. 그동안 사회적-정치적 동력을 형성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정규직 중심의 전통적인 노동조합 운동이 ‘고전적’ 접근방식에도 문제가 있었던 것 아닐까? ‘전부 아니면 전무’ 방식의 접근을 했던 것은 아닌지 성찰해볼 여지가 있다고 본다.

우리는 세상을 ‘점진적’으로 바꿔야 한다. 사회적-정치적 동력을 형성할 수 없다면, 제 아무리 윤리적으로 올바른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것은 엘리트주의적 자기 독백에 머무를 뿐이며, 실제로 비정규직의 현실을 개선하는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2013년 4월 임시국회에서 통과된 ‘가맹사업법’(=프랜차이즈법)에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 담겨있다. 그것은 가맹점주인 자영업자들에게 ‘사업자단체’의 결성권 및 협의권을 제도적으로 보장한 부분이다. 전통적인 노동조합 운동의 용어를 차용하자면, ‘노동2권’을 보장한 셈이다.

다만 노동자성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자영업자의 성격을 그대로 인정했기에, 노동법을 통한 접근이 아니라 경제법을 통한 접근이라는 점이 다르다. 그렇기에 본사에서 사업자단체의 결성・가입・활동을 이유로 가맹점주-대리점주에게 불이익을 줄 경우 그것은 ‘불공정 거래행위’로 간주된다(이 법은 현재 법사위에 계류 중이며, 6월 임시국회에서 통과될 전망이다. 법의 통과시점과 별개로 편의점협회와 점주들의 모임은 단체교섭을 추진할 예정이다).

그간 한국사회에서 비정규직 문제는 양극화 해결의 가장 중요한 열쇠임에도 별다른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정책적-정치적-조직적 측면 모두에서 그렇다. 즉, 한국의 정치권도, 노동운동도, 시민운동도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해법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측면이 있다. 그리고 넓게 본다면, 자영업자들의 처지 역시도 비정규직과 크게 다르다고 보기 어렵다. 자영업자들이 겪는 ‘갑을관계’의 횡포에 대한 사회적 분노를 지렛대로 삼아야 한다. 이에 기반한 경제법적 접근은 비정규직의 어려운 실제 현실을 개선하는 데 하나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다. 비정규직은 자영업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경제법에 국한될 필요가 없음은 물론이다.

일례로 특수고용노동자 문제에도 새롭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특수고용노동자는 자영업자의 성격과 노동자의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는 존재이다. 2013년 1월 국민권익위원회는 노동부에게 특수고용노동자의 처지에 맞는 대안 입법을 마련하는 권고를 했다. 특수고용노동자는 두 종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위장된’ 특수고용이다. 둘째, ‘실제로’ 특수고용인 경우다. 첫 번째 경우는 노동법의 적용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 두 번째 경우는 경제법과 노동법의 중간지대쯤에 해당하는 ‘특고법’의 별도 제정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삶을 바꿔내는, 새로운 실천이 필요하다

민주당은 민주당대로, 진보정당은 진보정당대로 비정규직 문제에 대한 그간의 접근을 한번쯤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변화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비정규직의 현실을 점진적으로 개선하려는 새로운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비정규직 문제를 접근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사자들의 삶의 개선 그 자체다. 새로운 현실은 새로운 이념, 새로운 노선, 새로운 접근, 새로운 실천을 필요로 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시행착오는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노선-접근-실천이 실제로 대안적 힘을 발휘하여, 비정규직의 삶을 실제로 개선시킬 수 있는지 여부는 열정과 근성, 헌신성과 유능함으로 훈련된 사람들의 ‘실천’에 의해서 결국 좌우될 것이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7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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