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새해를 맞는다. 해가 바뀌면 누구나 보람있고 희망찬 설계도를 그리며 앞으로 나아가기를 소망한다. 비관보다는 낙관, 슬픔보다는 기쁨, 낙망보다는 환희가 많은 쪽으로 달라지기를 바란다. 아마도 어려운 사람들일수록 변화에 대한 바람은 보다 크고 간절할 것이고 내일을 기약할 수 있는 조그만 가능성이라도 주어지기를 기대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해 보이지 않는다. 지금까지 삶의 과정이 너무도 힘들고 어두웠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어디에 와 있고 어느 쪽으로 움직여 가야 하는가? 아무도 가보지 않았고 살아보지도 않은 2015년을 쉽사리 점칠 수는 없지만 도도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지난날을 돌이켜 내일을 전망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세월호의 슬픔도 가린 정부의 ‘경제살리기’
2014년 우리 사회의 속살을 속속들이 드러낸 것은 세월호 참사였다. 304명의 목숨-그 대부분이 나어린 학생들이다-을 앗아간 이 참사는 ‘사람보다 돈’을 앞세운 우리 사회의 뒤틀린 총체적 모순을 속속들이 드러냈다. 한없는 자본의 탐욕과 정부의 규제완화, ‘관피아’라는 부패와 비리의 사슬, 직업윤리의 마비와 안전 불감증 등등 세계 15대 경제강국의 압축성장사에서 누적된 문제들이 서로 얽혀 빚어낸 참극이었다. 유족들과 국민들은 견디기 어려운 슬픔과 치미는 분노를 노란 리본에 매달며 조속한 희생자 구원과 분명한 진상 규명을 요구했다. 대통령을 비롯한 권력자들은 ‘책임자 엄단’과 ‘대한민국 개조’를 눈물을 글썽이며 약속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세월호 유족들의 절절한 요구는 대통령의 발목을 잡으려는 불순함으로 매도됐고 ‘눈물의 약속’은 냉담한 외면으로 마감됐다. 절망·비탄· 울분을 누른 채 조용히 생활전선으로 돌아온 유족들과 국민들에게 반년을 훨씬 넘어 주어진 것은 전도(前途)가 극히 의심스러운 특별조사위원회 구성과 관련 행정 관서의 형식적 재편뿐이었다.
세월호의 비원(悲怨)을 가려버린 의제는 ‘경제살리기’였다. 갈수록 심화되어 가는 경제위기 속에서 민생을 돌보는 것이 더 급하다는 것이었다. 그 내용은 시대적 의제라며 대통령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던 경제민주화와 복지확충을 포기할 때 이미 제시된 것이었다. 곧 ‘경제혁신’, ‘창조경제’로 포장된 대자본 중심, 수출주도의 경제성장전략이었다. 이를 위해 모든 규제는 “암 덩어리”이자 “일자리 창출과 투자를 가로막는” 것에서 “한꺼번에 단두대에 올려”야 하는 대상으로 격상되었다. 한때 ‘초이노믹스’라는 이름으로 소득분배 주도의 경제가 강조되기는 했다. 허나 실상은 ‘돈을 풀고 빚내서 집을 사게 하자’는 것이었고, 이마저 얼마 지나지 않아 경직된 정규직 고용 관행의 혁파를 핵심으로 하는 구조개혁으로 돌변했다. “규제완화는 새로운 자본주의 독재의 위험요소”라는 로마 가톨릭 교황의 경고나 ILO(국제노동기구), IMF(국제통화기금),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등이 거듭 강조하는 ‘불평등의 위험’은 참고자료에 그친 듯 했다. 결국 지난 7년을 풍미했던 경제살리기란 석양으로 기울어가는 신자유주의를 부여잡고 재벌이 주도하는 고도성장시대 신화를 재현하자는 것에 다름없다. ‘갑질’의 횡포나 ‘땅콩회항’으로 대변되는 천민자본의 만용, 그리고 경제인 범죄에 대한 관용 등은 경제성장 제일주의와 대자본의 권력화시대에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도 있었다.
대통령의 불통정치가 무너뜨린 민주주의
세월호 참사는 국민들에게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숱한 목숨들이 죽어가는 사이에 국가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의문은 국가를 운용하는 제도와 사람들의 변화, 즉 정치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 승자독식의 대통령중심제를 바탕으로 한 제왕적 권위주의는 오히려 더 강화되었다. 밀실인사의 실패에 대해 대통령이 세 번씩이나 사과했지만 패착은 되풀이되었다. 국가정보기관의 대선개입이나 청와대 비선사건 같은 중차대한 정치문제가 ‘찌라시’라는 한마디로 정리되고, 반대파의 반발은 ‘대선불복종’이나 종북 추종의 낙인으로 잠재웠다. 거대 집권여당과 검찰이 호위무사를 자임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늘었다. 대북한 정책은 흡수통일전략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고 화해와 협력론은 무모한 이적행위로 재단되었다. 이러한 일방 독주의 권력집중은 국민대통합과 국민행복시대에 역행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으나, 수정이나 개선의 조짐은 보이지 않았다.
소통의 부재, 불통정치로 지칭된 이런 통치형태는 단순히 정권안보를 넘어서 사회 전체를 획일적이며 보수적인 분위기로 몰아가고 있다. 수구언론의 반민주, 반평화의 공세는 오래 전부터 위력을 발휘하고 있었거니와 갈수록 강자 편향이 짙어지는 사법부의 판결 경향, ‘일베’의 준동, 서북청년단의 부활 등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 그 가운데 사법부는 체제수호를 위한 최후의 보루로서 민주화 과정에서 이룩했던 진취적 변화의 성과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급속한 보수화의 경향을 자주 드러냈다. 최근 대법원의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적법 판결과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이 그 전형이었다. 쌍용자동차 판결은 모든 기업의 정리해고를 정당화함으로써 사회양극화의 위험을 가중시켰다. 헌재의 통합진보당 해산결정은 “자유민주주의를 확고하게 지켜낸 역사적 결정”이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비판의 논점은 통합진보당이 자유민주주의체제에 대한 위협요소가 결코 될 수 없음에도 낡은 냉전적 사고와 견강부회의 정치적 판단에 갇혀 민주주의 정치의 기초를 무너뜨렸을 뿐만 아니라 민주적 사법권을 지키라는 역사적 설립 소명을 버리고 스스로의 존립기반 마저 파괴했다는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헌재 결정 직후부터 통합진보당 당원 고발 등 보수세력의 민주진보진영에 대한 마녀사냥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자유민주주의체제 수호라는 이름 아래 국민의 자유와 민주적 기본권을 부정하고 보수 일변도의 체제를 구축하려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전략의 일환이다.
2014년, 치열하고 처절했던 노동의 저항
지배 권력의 독주는 스스로 모순을 드러내면서 반대파의 강한 저항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야당은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정치개혁을 시도했고 한때 101일간의 장외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새정치민주연합은 130개의 국회 의석을 보유한 거대 정당임에도 그에 걸맞는 전략과 전술을 구사하지 못하고 집권당에 끌려다님으로써 ‘새누리민주연합’이라는 비판까지 받는 형국에 놓였다. 시민사회운동 세력들도 사안별로 다양한 연대틀을 만들어 나름대로 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힘의 분산을 극복하지 못한 채 막강한 지배 권력에 대항하여 힘겨운 투쟁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다.
노동의 저항은 치열하고도 처절했다. 제도, 정책, 사법부 모두가 노동을 냉혹하게 외면했다. 합법적인 파업도 해고 혹은 구속, 손해배상이나 가압류로 압박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노동운동 조직은 자체의 생존을 걱정해야 했고 노동자들의 투쟁 조건은 시간이 갈수록 악화됐다. 노동자들이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고 투쟁은 필연이었다. 파업건수가 2013년의 72건에서 지난해는 11월까지 105건으로 급증했다. 목숨을 건 극한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일도 많아졌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노동자와 그 가족 가운데 스물여섯 명이 절망에 허덕이다 스스로 목숨을 버렸고, 삼성전자서비스 최종범 열사와 서울 압구정동 신현대아파트 경비노동자 이만수 씨에 이르는 20여 명의 노동자들이 치열한 싸움 끝에 자결하였다. 아울러 노동자들은 굴뚝, 철탑, 종탑에 올라 장기간 혹독한 추위와 더위, 공포에 목숨을 맡겼다. 이들은 사내하청 문제의 해결, 비정규직의 철폐, 노동탄압의 중단 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권력과 자본은 대부분 법과 원칙의 적용을 내세워 냉담한 반응을 보이거나 교묘한 부당노동행위와 거액의 손해배상청구 및 가압류로 노동자들의 저항의지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자 했다.
노동운동 현장은 탄식과 낙망이 희망과 투지를 대신하고 노동운동은 장기간에 걸친 침체의 늪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였다. 민주노총에 대한 경찰의 침탈을 규탄하며 모처럼 총파업을 시도했지만 이미 동력을 잃은 지 오래된 현장의 힘으로 전세를 역전시킬 수는 없었다. 그런 상황 하에서도 새로운 시도들이 나타나 주목을 끌었다. 노조조직률 하락에서 상승으로의 반전, 현장 노동자 투쟁과 주민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희망버스’ 운동의 확산, 사내하청 노동자들의 조직․법률 투쟁, 비정규노동자들의 전국 조직화와 교섭의 진전, 철도․가스․전력․보건의료 등 공공성 확보투쟁에 대한 국민 지지도의 상승, 무노조의 아성 ‘삼성왕국’에서의 신규조직화 성공, 청년 노동자들의 전국․지역 조직화 진전, 기륭전자․재능교육․골든브릿지증권처럼 장기투쟁을 끝낸 사례 등이 그 대표적인 예들이었다. 그러나 이들 시도들은 더욱 확장시켜야 할 가능성일 뿐 노동운동의 재활성화를 담보하는 확실한 전망으로 보기에는 아직 이르다.
사실상 시작된 노동에 대한 새로운 공세
새해 총자본의 공세는 어느 때보다 치열해질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어느 정부보다 자본권력의 지지도가 높아 보이고 거대한 수구 언론과 정보기관, 권력기관을 완전히 장악한 상태에서 각종 위기를 타개한 경험을 지니고 있다. 그 자신감을 바탕으로 보수 일색의 사회구도를 더욱 공고히 만들기 위해 모든 방책들을 동원할 것이고 민주․진보진영에 대한 압박의 강도를 더욱 높일 것이다. 그러나 정치는 생물이라는 말처럼 주변정세와 국내 세력관계의 변화에 따라 정세는 언제든지 격변할 수 있다. 더욱이 정권의 정체성에 대한 국민 의혹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고 민주주의 정치의 경험과 민주적 의견소통의 기반이 취약한 구조 하에서 내부 권력투쟁을 비롯한 정치위기는 상존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현 정부의 지배전략은 제왕적 권위주의에 의한 경제성장주의의 관철이다. 이를 위해 경제위기 극복이라는 명제 하에 구조개혁이 강하게 추진될 전망이고, 그 대상은 공공․노동․금융․교육부문이라 하지만 전략적 요충은 노동이다. 자본의 탐욕은 이미 신자유주의 자본의 세계화와 노동의 유연화 그리고 노동운동의 파괴라는 상당한 전과(戰果)를 올렸음에도 더욱 날카롭고 집요하게 노동의 해체를 강요할 것이다. 이미 공세는 경제부처에서 대통령으로까지 확대되었고 2014년 12월23일 ‘노동시장 구조개선의 원칙과 방향’에 대한 노사정합의는 정․재계의 일차적 성과물이다. 합의문은 노동시장 구조개혁․노동기본권 보장․사회안전망 확충을 원론적으로 언급하고 있지만 노동의 유연화가 핵심임은 이미 알려진 대로다. 총자본은 ‘경제살리기’라는 이름으로 노동의 고통분담을 강제하기 위해 총공세로 나올 것이 불을 보듯 분명하다.
노동운동의 역량 키워 시련의 세월을 타고 넘자
민주주의 후퇴와 삶의 조건이 악화될 가능성이 높아진 상황에서 근로대중은 어디까지 양보할 수 있으며 언제까지 인내할 수 있을 것인가. 새해를 맞아 또 하나의 시험대에 서 있다. 강대한 보수화의 공격 앞에 민주진보진영의 반발과 투쟁은 필연이다. 특히 노동의 저항은 최소한의 생존조건마저 위협받는 상황에서 더욱 완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적인 대응책은 무엇인가? 진부한 얘기지만 답은 이미 문제 안에 있다고 한다. 또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필승이라는 말도 있다. 무엇보다 오늘의 상황을 초래한 노동운동진영의 치열한 자기반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고 운동주체의 확립, 이념의 재정립, 투쟁 원칙의 정립과 실천, 동맹세력과의 연대와 통일을 이룩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민주노총의 임원직선제 결과는 조합원만이 아니라 국민들의 주목거리다. 임원직선제에 대해 전국중앙조직의 성격과 구조에 알맞지 않고 조직적 혼란과 현실적 한계가 분명하다는 점에서 반대 의견이 조직 안팎에서 많이 일어났다. 그럼에도 침체의 늪에 빠진 민주노총을 혁신하는 한 방편으로서 강행되었다. 임원직선을 통해 새로운 지도체제를 구축한 민주노총이 갈수록 엄중해지는 억압상황에 어떻게 대응하는가는 노동운동의 전망을 가늠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아무튼 정세는 변화하기 마련이지만 노동에 대한 총자본의 공세는 전례 없이 격렬해질 전망이다. 노동운동이 지닌 역량에 비추어 저항은 매우 힘겹고 그만큼 운동은 위축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자본과 노동과의 모순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겠지만 마치 강철이 열과 냉을 거듭하며 만들어지듯이 역사는 탄압이 심하면 운동도 강해진다는 역설의 성립을 보여준다. 새해 아침 동녘에 붉게 떠오르는 힘찬 태양을 바라보며 어디엔가 적힌 문구가 가슴을 울린다. 역사는 절망 속에서도 새로운 희망의 싹을 품고 키워낸다고 했던가. 우리 사회가 깊은 절망에 빠지지 않고 발전하면 좋으련만 아픔을 통해서만 성숙해지고 성장하려나 보다고. 근거 없는 낙관을 경계해야 하듯이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는 비관도 금물이라는 경구를 되새기며 시련의 세월을 타고 넘자고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