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지난 5월4일 서울 서대문에서 마포 공덕동으로 보금자리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5월29일에는 입주식도 마쳤습니다.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축하해주시고 덕담을 건네주셨습니다.
돌이켜 보면 18년 만에 공덕동 부근으로 돌아온 셈입니다. 지금 사무실에서 공덕동 오거리를 중심에 두고 남쪽 방향 대각선에 위치한 서울대학교동창회관이 연구소 창립총회를 가졌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때가 1995년 4월28일, 옛말대로라면 강산이 두 번 바뀐 긴 세월 동안 연구소는 격렬한 노동운동의 역사와 함께했습니다. 그 사이 연구소는 회현동 남산빌딩에서 1995년 4월부터 4년 1개월을 머물렀고, 충정로 석당빌딩에서는 1999년 5월부터 무려 14년을 보냈습니다.
노동운동 사랑방에서 든든한 지원자로
연구소의 원뿌리로 치면 그 역사는 2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김금수(현 연구소 명예이사장), 천영세(전 민주노동당 대표), 김유선(연구소 전 소장, 현 선임연구위원) 세 명이 1986년 4월 서울 홍제동에 한국노동교육협회라는 조그만 사무실을 마련한 것이 그 출발점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는 반독재 민주화 항쟁이 비등점으로 치솟는 전야였고, 노동운동도 새로운 변화를 향해 치열하게 몸부림치던 시절이었습니다. 마침내 1987년 민주항쟁이 폭발하고 노동자대투쟁이 질풍노도처럼 전국을 휩쓸면서 한국노동교육협회는 노동운동과 관련한 교육·상담·출판·토론의 중심지로 부상합니다. 이 무렵 수많은 단위노조, 지역조직, 업종 산별조직의 간부나 활동가치고 협회를 거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고, 교육사례는 당사자들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고 합니다.
이런 활동상황의 변화를 반영해 협회는 1987년 10월 서울역 앞에 있는 광풍빌딩으로 자리를 옮기고, 1993년에는 삼각지에 새둥지를 틉니다. 그로부터 협회는 민주노조운동의 급속한 성장의 든든한 지원자로서 그리고 격동의 시대 산 증인으로서 소임을 다하면서 노동운동의 상황 변화에 조응하여 변화를 시도합니다. 민주노동운동의 조직발전에 맞추어 종래 교육 중심에서 운동전략과 정책싱크탱크로서의 임무를 자임하려 한 것입니다. 이런 판단에 따라 1994년 7월 협회는 ‘연구소 설립’을 제의했고, 그해 10월에는 이사, 운영위원 합동회의에서 연구소를 설립하기로 결정한데 이어 11월에는 노동조합과 각급 단체에 가칭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준비위원 참가를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1995년 2월 연구소 준비위원회를 열어 준비위원장에 고(故) 김진균 교수님을 비롯하여 공동대표에 고 김진균, 김금수, 천영세, 단병호, 박원순을 선출했고 발기인 모집에 들어갔습니다. 이 와중에 회현동 남산빌딩으로 자리를 옮겼고 발기인은 모두 228명에 4,440만 원의 성금이 모였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1995년 4월28일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정식으로 출범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연구소는 지향점을 이렇게 내세워 왔습니다.
이에 따라 연구소는 이 시대 노동운동이 필요로 하는 이론과 정책을 개발하여 전파하고, 노동자들을 교육하는 데 온 힘을 다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연구원들이 연구소를 거쳤습니다. 연구원들은 어느 누구도 노동자의 처지에서 벗어나지 않고, 모든 문제를 현장의 관점에서 실천적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연구소는 연구, 교육, 상담, 토론회, 회보 발간, 간행물 출판 등을 주요업무로 추진했습니다. 연구과제 230건, 토론회 118회(협회 8회 포함), 간행도서 53권(협회 12권 포함), 기관지『노동사회』180호(협회 회보『노동조합의 길』10호 포함) 발간, 기획교육 110여 회, 파견교육 2,850여 회 등이 대체적인 실적입니다. 이 밖에 남아공-브라질과의 연대와 각종 국제기관 참가 등을 포함한 다양한 국제 활동을 추진함으로써 세계노동운동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했습니다.
이 모든 성과들은 여러 어려움에도 적극 참여하고 지원을 아끼지 않은 회원들과 수많은 활동가들, 연구자들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그 결과로 노동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세워졌던 많은 단체들이 명멸하는 속에서도 연구소는 아직까지 자리를 잃지 않은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생존을 위한 악전고투의 시기를 넘어
그러나 이러한 활동과 성과들이 노동운동의 발전과 노사관계의 민주화에 어느 정도 기여했는지는 다시 한 번 명확하게 평가해봐야겠지만, 연구소의 생존 자체를 위해 상당부분 힘을 들일 수밖에 없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연구소를 둘러싼 현실적인 제약 때문이었습니다. 당초의 지향점을 향한 왕성한 의욕만으로 극복하기에는 너무도 완강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재정적인 어려움 때문에 연구원들에게 노동운동을 위한 헌신성이나 사명감만을 요구할 수가 없었고, 노동운동의 중점과제들에 대한 연구에 모든 힘을 기울일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수행한 연구과제들이 가치판단 없이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고, 최대한 현장의 고민을 해결하고 정책대안을 마련한다는 점을 기준으로 삼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어느 연구결과물을 봐도 노동자의 처지에 서서 접근하고 실천적인 대응책을 제시하고 있는 점은 당초의 지향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자위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재정적 어려움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지경이었습니다.
연구소가 직면한 시련은 2008년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이후 극에 달했습니다. 이 정권은 회원의 회비에 대한 소득공제 혜택을 박탈했고, 정부나 공공기관의 연구과제 수주를 원천적으로 봉쇄해버렸습니다. 연구소는 사무실을 축소하고 연구원의 근무형태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명박 정권의 탄압이 운동판 전체에 밀려왔지만, 생존기반이 취약한 연구소에게는 그야말로 악전고투의 5년이었습니다. 연구원 전체가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노력한 결과로 연구소는 존립기반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고진감래라 했던가, 회원들의 성원과 연구원들의 헌신, 그리고 뜻있는 한 분의 재정후원으로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앞으로도 연구소가 계속 성장할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할 것입니다만, 오늘이 있기까지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격려해주신 회원들과 노동동지들, 그리고 험난한 시련을 극복하고 연구소를 지켜낸 연구원들과 연구과제를 제공한 조직과 단체, 연구과정에 함께한 연구자들에게 거듭 감사할 따름입니다.
배신당한 새 시대로의 열망
연구소를 옮기고 난 지 한 달 만에 박근혜 정부의 출범 100일을 맞았습니다. 51%의 지지로 대권을 장악한 박 정권은 ‘국민통합’과 ‘국민행복’을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그 정책수단으로 복지혜택의 확대와 경제민주화 개혁을 제시했습니다. 정권교체와 새 시대로의 전진을 열망했던 48%의 국민들은 ‘멘붕상태’에서 가까스로 벗어나, 이명박 정권이 저질러놓은 과오를 더 이상 되풀이하지 않고 다음 시대를 위해 잘해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기대는 너무도 쉽게 무너지는 것 같습니다. 시대적 의제로 부상했던 경제민주화는 대통령 취임 직전 제시한 국정 목표에서 슬며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불통(不通)의 인사스타일을 고수하면서, 개성공단의 철수를 포함한 대북 강경정책으로 신뢰프로세스로 표현되는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기대는 속절없이 허물어졌습니다. 재벌과 자본가들의 조세피난처와 페이퍼 컴퍼니 파동·탈세의혹이 꼬리를 무는가 하면 진주의료원 폐쇄와 원자력발전소 불량부품, 송전탑 설치, 무상보육을 둘러싼 비리가 속속 실체를 드러냈습니다.
골목상권까지 싹쓸이하는 자본의 탐욕 아래 힘없는 자영업자들의 탄식이 ‘갑을관계’의 비극을 드러내면서 죽음으로 끝맺고, 내일에의 꿈을 빼앗긴 비정규직, 정리해고자들도 연이어 목숨을 내던지는가 하면 숱한 노동자들이 수천, 수백 일 동안 텐트 안 또는 고공에서 절박한 절규를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공정거래법 개정 문제는 새누리당의 갑을상생론, 속도조절론, 경제위기론에 의해 날이 갈수록 짙은 안개 속으로 감춰지고 있습니다. 뉴라이트 지식인들과 수구보수언론들이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역사왜곡으로 학교교육을 황폐화시키는 사이, 상식을 넘는 ‘일베현상’이라는 것은 젊은이들의 의식을 파고드는 듯합니다. 이 현상은 우리 사회가 민주화에 역비례해서 오히려 삶의 상태가 더 나빠지는 것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진보와 민주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적대시한 결과라고 지적되기도 합니다. 사내하청 문제나 특수고용노동자 문제, 통상임금 문제, 노동시간 단축 문제의 진전이 권력과 자본에 의해 밀리면 이 ‘배반감의 논리’는 더욱 확산될 거라는 우려도 높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각론도 새누리당이 국정원의 지원을 받아 목청껏 외치는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NLL포기설’ 한 방에 허공으로 흩어질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원래 권력이란 가진 자의 것이고 저항세력의 힘에 의해 조절되는 것이라지만, 1960년대 이래 반세기 넘어 형성되어온 지배세력의 저력이 얼마나 크고 강한 것인가를 실감케 하는 국면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벼랑으로 내몰린 노동운동의 암담한 현실
반면 이 사회의 가장 큰 저항세력이라 할 노동운동의 대응은 매우 미약해 보입니다. 이런 저런 반발의 몸짓이나 항변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크기나 결합도, 집중력은 전례 없이 허약합니다. 사실상 이렇다 할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극단의 비판도 나옵니다. 그만큼 노동운동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그래서 운동의 침체를 넘어 끝 모를 추락이 계속되고 있다는 지적과 함께, 파산의 우려와 비관의 신음까지 거듭되는 듯합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래 이 나라 역사발전의 주축으로 자처할 만큼 급성장했던 노동운동이 이토록 위기에 몰린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원인은 일차적으로는 지구촌 구석구석을 파고든 자본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전략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빈곤의 세계화로 귀결될 탐욕의 세계화는 취약하기 그지없는 한국의 경제구조를 근저로부터 뒤흔들었고, 지배권력은 경제위기 극복을 명분으로 노동의 희생 및 양보와 자제를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이에 불응하면 법과 원칙이라는 채찍을 가차없이 가했습니다. 노동 내부도 양적 유연화를 근간으로 한 자본의 노동관리에 의해 크게 변화했습니다. 권력과 자본의 변화에 대응하는 역량을 튼튼하게 쌓을 여유를 갖지 못한 데다가 변화에 둔감한 조직의 생리에 의해 노동운동은 속절없이 밀렸습니다. 그러나 노동운동이 객관적인 조건에 적응하면서 새로운 상황을 쟁취해내는 과정이라고 본다면, 오늘의 암담한 현상은 새로운 도전과 변화를 극복하지 못한 운동의 주체들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은 새삼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새 길 위에서, 현재를 단단히 움켜쥐며
물론 이에 대한 자성과 대안모색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도 새로운 방향을 찾으려는 노력들이 경주되고 있습니다. 노동 중심의 민주화론이나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재구성, 산별노조운동론 등이 그 예입니다. 아직 분명하게 검증된 것은 아니지만 진보적 자유주의론도 나오고 있고, 역사적 타당성이나 논리적·현실적 근거를 갖고 있는지 확실치 않은 사회민주주의 지향성도 표출되고 있습니다.
아무튼 현장 문제의 실천적 해결과 중장기적 방향 정립과 관련해 숱하게 제기될 쟁점의 홍수 속에서 출범 이래 끊임없이 노동운동의 발전을 바라왔던 연구소로서는 그 지향점을 어떻게 실현해낼 것인지 중요한 과제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 속에서 노동운동의 새 길을 찾아내는 데 우리가 가진 지혜와 역량을 총동원해야 하는 것이 연구소의 임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회원님들의 더 많은 참여와 관심이 어느 때보다 요구되고 있고, 연구자들의 광범하고도 긴밀한 네트워크가 형성되어야 할 것으로 봅니다. 일제에 굴하지 않았던 사실주의 소설가이자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말살보도로 유명한 소설가 현진건은 <운수좋은 날>이라는 소설에서 시대를 살아가는 길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거를 더듬으며 한숨이나 쉴 일이 아니오, 미래를 바라보며 팔만 벌리고 있을 것이 아니다. 손아귀에 단단히 힘을 주어 현재를 움켜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