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수의 세계노동운동사 58

노동사회

김금수의 세계노동운동사 58

이주환 0 5,729 2013.08.20 03:41
인민전선 형성
 
1934년 2월6일에 일어난 극우단체들의 폭동에 대한 대응에서도 서로 대립하였던 사회당과 공산당이, 같은 해 7월27일 ‘통일행동협정’을 맺었고 10월에는 공산당이 이 협정에 새로운 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 급진당 측에 인민전선 참여를 제안하였습니다. 1935년 7월14일 사회당, 공산당, 급진당, 그 밖의 반파쇼 세력이 결집한 가운데, 인민전선이 드디어 출범하였죠. 그렇지만 인민전선의 형성 과정은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고, 거기에는 여러 가지 우여 곡절과 장애 요소들이 존재하였습니다. 
먼저 공산당과 사회당의 대립을 들 수 있습니다.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1928년 노선(계급 대 계급 당시의 상황을 ‘혁명적 공세기’로 규정하고, 노동자계급의 독자 역량으로 사회주의 혁명을 이룩하려는 혁명노선을 말한다.
대공황이 한창이던 1933년 런던 세계경제회의에 참석한 프랑스대표단
)을 엄격하게 적용하면서, 사회당을 부르주아지의 도구이자 ‘노동자계급에 대항하는 자본가의 공격 수단’이라고 비난하였어요. 공산당이 규정하는 ‘사회 파시즘’은 파시즘과 그 밖의 부르주아 정치 사이의 구별을 하지 않으면서, 사회주의자들이 자유주의 제도를 옹호하고 개혁주의의 환상을 조장하며, 노동자들을 혁명의 진로에서 벗어나게 한다고 공격하였죠. 
사회주의자들은 ‘통일전선’을 구성하여 공동투쟁을 전개하자는 공산당의 제안에 대해 극도의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회당은 공산당에 대해 악의를 갖고 아무것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죠. 사회당은 “우리는 결단코 볼셰비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그저 심하게 다룰 것이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지난날에도 두 정당이 서로 협력하고자 했던 노력은 그 때마다 비난과 원망으로 끝나고 말았죠(일리, 2008: 481~482).
공산당과 사회당의 이와 같은 대립과 갈등은 2월 행동을 거치면서 점점 협력 쪽으로 기울게 되었어요. 프랑스 공산당의 공식적이고 결정적인 노선 변화는 1934년 6월23일부터 6월26일까지 파리 교외 이브리에서 열린 전국협의회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당이 마치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파괴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오류이므로 중단해야 한다고 밝혔던 거죠. 또 파시즘에 대한 투쟁을 최대 목표로 설정하고, 이를 위해 모든 경향의 노동자와 프티 부르주아지, 중간계층까지도 결합해야 한다는 방침을 채택했습니다. 
당 협의회가 규정한 세 가지 기본 지침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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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우리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파시즘에 맞서 사회당계 노동자들과 행동통일을 실현하기를 원한다. 
② 우리는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단일 CGT로 노동조합 통일을 이루기를 원한다.
③ (……) 우리는 중간계층을 파시즘의 악선동으로부터 구해내어 …… 프롤레타리아 편에 끌어들이기를 원한다(이용우, 1993: 68~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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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정강과 지침에 따라 프랑스 공산당이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가장 중대한  임무는 프랑스 공산당과 프랑스 사회당, CGT와 CGTU 사이의 분열과 적대 관계를  극복하는 일이었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330).
 
그렇다면 인민전선 형성에서 가장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던 공산당의 이러한 노선 전환을 가져온 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1932~1933년의 암스테르담―플레이엘(Amsterdam―Pleyel) 운동과 코민테른의 기본 노선 전환, 그리고 프랑스 공산당의 요구 투쟁 강화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Histoire du Parti Communiste Français, Mauel, 1964, Chambaz, J., 1961, Le Front Populaire pour le pain, la liberté et la paix, Willard, C., 1967, Socialisme et Communisme  Français, Paris, Armand Colin, 이용우, 1993: 4에서 재인용.
 
암스테르담―플레이엘 운동은 노동자, 지식인 등 광범한 계층을 참여시키고자 의도한 국제적인 반전운동으로서, 이 운동을 구상한 사람은 코민테른 간부 뮌젠베르크(Münzenberg, W.)였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을 실제로 발의한 사람은 프랑스 지식인 로맹 롤랑(Romain Rolland) Romain Rolland(1866.1.29~1944.12.30): 프랑스 부르고뉴 클람시에서 출생하여 고등사범학교에서 역사학을 전공했다. 소설가, 극작가, 평론가로 활동했으며, 고등사범학교 교수를 역임하였고, 《장 크리스토프》를 창작하여 1915년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였다. 드레퓌스 사건(1894~1899) 때는 드레퓌스를 옹호하였고, 국제파시스트의 대두와 더불어 반파시즘 투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반(反)나치 저항 투사들을 격려했으며, 1944년 8월 프랑스가 해방되었을 때 시골에서 죽었다.
과 앙리 바르뷔스 Henri Barbusse(1873.5.17~1935.8.30): 프랑스 아스니에르 출신으로 소설가, 시인으로 활동했다. 평화와 인간해방을 지향하는 클라르테(Clarte)운동을 지도했으며, 인도주의 관점에서 비참한 민중생활과 전쟁 비극을 작품으로 묘사하였다. 작품으로는 《포화》, 《클라르테》, 《지옥》 등이 있다.
(Henri Barbusse)였죠. 이들은 1932년 5월27일 “정치적 소속에 관계없이 모든 남자와 여자, 모든 노동자 조직, 모든 세력과 모든 조직에게” ‘전쟁에 반대하는 국제대회’(이하 ‘반전 국제대회’)에 참가할 것을 촉구하는 공동호소문을 발표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공산당, 인권동맹, 평화와 자유를 위한 여성동맹, 양심적 병역기피자 동맹 등의 단체가 호소에 호응하였죠. 
반전 국제대회는 1932년 8월27일부터 8월30일까지 암스테르담에서 열렸어요. 대회에는 27개 국가에서 2,196명의 대표가 참가했습니다. 참가자의 정치적 구성을 보면, 공산주의자 830명, 사회주의자 291명,  ‘노동자사회주의 인터내셔널(제2인터내셔널)’의 반대에도 참석한 사람들이다.  
 ‘무소속과 그 밖의 단체들’ 소속이 1,041명이었습니다. 국가별로는 독일이 전체 참가자의 34.56%로 가장 많았고, 그 다음이 프랑스로 26.53%, 네덜란드 20.85%, 영국 14.48%, 체코슬로바키아 2.5% 등이었죠. 
암스테르담 대회가 발표한 선언문은 각국의 전쟁 준비를 비판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전쟁의 원인으로 규정했으며, 소련 방위를 위한 모든 피착취자의 단결과 각국 부르주아지에 맞선 노동자들의 행동 전개를 촉구하였습니다. 대회가 끝날 무렵 ‘제국주의 전쟁에 맞선 투쟁을 위한 국제위원회’(일명 ‘암스테르담위원회’)가 선출되었고, 암스테르담 대회를 계기로 하여 프랑스 여러 곳에서 500~600개에 이르는 투쟁위원회가 생겨났죠. Prézeau, J., 1984, ' Le mouvement Amsterdam-Pleyel (1932~1934): un champ d'essai du Front unique', CHIRM, n°18,  88~89, 이용우, 1993: 20에서 재인용.
다음해인 1933년 6월4일부터 6일까지 ‘반파쇼 유럽대회’가 파리의 플레이엘 회관에서 열렸습니다. 암스테르담 대회 때보다는 적은 수의 국가들에서 대표들이 참가했으나, 대표자 수는 3,200명으로서 오히려 더 많았어요. 프랑스 공산당 정치국은 6월17일 암스테르담 운동과 플레이엘 운동을 결합시킬 것을 결정했고, 국제적 차원에서 행한 결정은 8월15일에 이루어졌습니다.
암스테르담―플레이엘 운동이 프랑스 공산당의 노선 변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살펴봅시다. 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이 운동은 부분적이나마 사회당원들과 ‘하층 통일전선’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둘째, 이 운동을 통해 중간계층을 비롯한 새로운 계층을 포섭할 수 있었습니다. 셋째, 반전이라는 투쟁과제와 반파쇼라는 투쟁과제를 결합할 수 있었죠.
한편, 프랑스 공산당의 노선 전환과 인민전선 형성에서 코민테른의 역할은 어떠했던가에 대해서는 논쟁의 대상이 될 정도로 복잡합니다. 프랑스 공산당의 공식 사가들은 노선 변화의 동인(動因)으로 코민테른과 프랑스 공산당 사이의 ‘동등한 협력관계’를 강조하거나 프랑스 공산당의 주도성을 강조합니다. 이에 반해 다른 역사가들의 관점은 ‘모스크바의 지침’ 즉 코민테른의 지령이 프랑스 공산당 노선 전환과 인민전선 형성의 주요 추진력이었다고 주장하죠. 
당시 코민테른은 소련 당과 중국 당 말고는 최대 지부로 부상한 프랑스 공산당에 대해 당 전국협의회에서 채택할 방침의 근간이 될 수 있는 지침을 보냈습니다. 1934년 6월11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정치위원회는 모스크바 주재 프랑스 공산당 대표 바사르가 참석한 가운데 작성한 서한을 프랑스 공산당에 보냈습니다. 그 서한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대한 태도의 변화였죠. 서한은 당이 마치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파괴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정치적 오류’이므로 중단해야 한다고 했어요. 또한 서한에서는 파시즘에 대한 반대투쟁이 주요 목표로 설정되었고, 이를 위해 모든 경향의 노동자들을 결집시키며, 프티 부르주아지의 요구들을 고려하는 반파쇼 전선 구축의 중요성이 강조되었습니다(이용우, 1993: 67). 
이러한 코민테른의 방침 변화와 지시가 있었지만, 코민테른의 역할이 곧바로 프랑스 공산당의 노선 전환을 가져왔다고 단
정할 수는 없죠. 그동안의 상황 전개와  투쟁 국면을 고려할 때 프랑스 공산당의 주체적 역량을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프랑스 공산당의 노선 전환을 가져온 계기의 하나가 된 ‘대중사업과 요구 투쟁’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살펴본 바 있거니와, 이것은 단순히 ‘선행적 변화’에 그친 것이 아니라 1934년 상반기의 ‘통일전선’ 형성 및 강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와 같은 계기들을 통해 형성된 인민전선 형성의 실제적 과정을 살펴봅시다. 
1934년 7월27일 공산당과 사회당은 ‘통일행동협정’을 체결했는데, 이것은 파시즘과 전쟁 위험에 반대하는 투쟁을 통일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양 당의 공동행동을 규정한 것이었습니다. 양 당의 통일행동 협정은 CGT와 CGTU의 합동을 위한 길을 터놓았죠. 1년이 넘는 긴 시간에 걸친 교섭을 거쳐 1935년 9월 CGT와 CGTU의 대회는 각각 통합에 관한 결정을 채택하였습니다. 1921년 12월 CGT는 릴(Lille) 전체 대의원 대회에서 CGT와 CGTU(Cofédération Générale du Travail)로 분열되었다가 15년 만에 통합을 이루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코민테른의 노선 전환에 따른 프랑스 공산당의 정책 전환을 통합의 계기로 설명하고 있다. 그 밖에 Georges Lefranc은 파시스트의 위협과 국가 방위의 문제를 강조하고, Antonie Prost는 CGTU의 노동조합원 급격한 감소를 그 원인으로 제시한다(박단, 1996: 94)
 
1936년 3월 툴루즈에서 통합대회가 열렸어요. 타협의 기초 위에서 만들어진 통일노동조합운동 헌장에는 여러 가지 한계가 있었으나, 특히 통일된 노동조합운동의 계급적 성격이 강조되었습니다. 툴루즈 대회는 반파시즘 세력의 동맹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죠. 이러한 과정을 거쳐 노동조합운동이 통일을 이룩한 뒤, 노동조합 조직률은 급격하게 증가하였습니다. 통합 당시 두 노동조합 센터의 조합원 수는 약 90만 명이었으나 1년 뒤 통일 CGT의 노동조합원은 이미 400만 명에 이르렀죠.
프랑스 노동운동의 통일 실현이 갖는 의의는 실로 중대하면서도 큽니다. 오랫동안 반목과 충돌을 겪은 끝에 비로소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공통의 적인 파시즘에 반대하는 투쟁의 기초 위에서 민주주의 실현, 국민의 영예와 존엄, 그리고 노동자의 긴요한 이익 옹호를 위한 행동통일에 합의한 사실이 그렇죠. 또 통일된 노동전선 형성은 프랑스 정치 영역에서 갖는 노동자계급의 역할을 증대시켰을 뿐 아니라, 노동자계급과 중간계층 사이의 동맹을 위한 중요한 여건을 창출하였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331).
1934년 10월 공산당은 공산당―사회당의 행동통일협정에 새로운 세력을 참여시키기 위해, ‘자유, 노동, 평화를 위한 인민전선’의 결성을 제안하였어요. 이 제안은 반파시즘 투쟁 전선 바깥에 남아 있는 도시와 농촌의 프롤레타리아트와 프티 부르주아지의 기본 부분을 인민전선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죠. 
도시와 농촌의 프티 부르주아지가 지지하고 있는 급진당이 인민전선에 참여할지를 결정하는 문제는 좌파와 협력하는 것을 반대하는 측과, 이른바 ‘젊은 말썽꾸러기’로 불리는 집단 사이의 역학 관계에 달려 있었습니다. 젊은 말썽꾸러기 집단은 우익 정당들과 협력관계를 갖는 데 대해 점점 회의적인 태도를 드러내는 분위기 속에서 세력을 강화하였죠. 한편, 반파쇼와 반전 슬로건을 앞세운 노동자투쟁은 공산당원, 사회당원, 급진당원의 전투적 협력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프라이스, 2001: 312).
프랑스의 반파시즘 인민전선이 최종으로 창설된 것은 1935년 7월14일 공화국 옹호를 위한 대규모 시위행동을 통해서였어요. 공산당, 사회당, 급진당은 약 50만 명이 참가한 파리 집회를 공동으로 개최했습니다. 집회에서는 전국에서 모인 반파시즘 조직의 대표들이 인민전선의 선서를 채택했죠. 시위행진의 선두에는 인민전선의 주요 정당 지도자들 ―공산당의 토레즈, 사회당의 블룸, 급진당의 달라디에― 이 앞장섰어요. 이날의 대중 시위는 광범한 대중들에게 정치적 민주주의와 반파시즘, 그리고 반전 투쟁의 중요성을 일깨웠습니다. 
1936년 1월12일에는 공산당과 사회당 그리고 급진당이 공동으로 작성한 인민전선 강령을 발표했습니다. 인민전선 강령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박스--------------
반파시즘 인민전선 강령의 주요 내용
 
1) 정치적 요구: 전체 대상자의 대사면, 준군사단체(파시스트 단체)의 무장해제와 해산, 국회의원 겸직 금지, 언론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과 긴급명령의 폐지. 신문의 개혁, 정보의 정확성과 정치단체・사회단체의 평등한 방송권 보장을 위한 국영 라디오 방송 창설, 모든 사람에게 노동조합 가입권의 적용과 존중, 근로여성의 권리 존중, 의무교육 연한을 14세까지 연장, 중등교육에 대한 무료 교육 보완, 학교 교육의 중립성, 교사의 비종교성과 공민권 존중, 해외 프랑스령의 정치・경제・도덕적 상태에 대한 국회 조사위원회 설치, 평화의 유지와 조직화를 위해 인민의 협력을 호소할 것, 침략자를 명확히 정의하고 침략이 행하여지는 경우에는 자동적이고 연대적인 제재를 적용. 무장 평화에서 비무장 평화로 이행하기 위해 노력할 것, 군수산업의 국유화, 비밀외교 방기, 프랑스・소련 조약(1935년 5월2일 체결)의 원칙에 따라 모든 국가에 열려진 조약체계를 적용할 것.
 
2) 경제적 요구: 국가 실업기금 제정, 임금 저하를 수반하지 않는 주당 노동시간 단축, 연금제도 제정, 대규모적인 공공사업 계획 실시, 농산물 가격의 재평가, 각 직종연합의 전국 곡물공사 신설, 농업협동조합에 대한 원조, 농지 임대료 인하, 긴급명령이 가져다 준 폐해의 시정, 프랑스 은행의 국영화, 소주주 이익에 대한 보장조치 강구.
 
3) 재계의 정화: 군수산업 국유화와 관련하여 무기 거래를 재검토할 것, 군인 연금금고 설치, 민주적인 세제 개혁과 대자산가에게 부담을 지우는 방책으로 재원을 창출할 것, 자본 유출 통제와 외국에 은닉 되어 있는 자산 몰수, 이와 동일한 가격에 상당하는 국내 자산 몰수 등 엄격한 조치로 자본 도피를 억제(동녘, 1989 3: 171~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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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정당이 동의하기 어려웠던 주요 쟁점은 사회개혁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방법, 국유화의 규모, 그리고 프랑화의 평가절하 문제를 다루는 경제정책 등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타협 과정은 온건한 편이었죠. 그것은 인민전선의 핵심 목적이 공화제를 방어하는 데 있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반증이었습니다. 좌파연합이 경제와 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것이라고 기대한 사람들에게는 실망스러운 일이었을지는 모르지만요. 그렇지만 협력관계에 들어간 정당들 사이의 상호 불신이 깊은 상황에서, 반파시즘과 반전 투쟁을 통일적으로 추진하는 일이야말로 인민전선의 최대 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죠(프라이스, 2001: 312). 
반파시즘 인민전선의 형성과 더불어 인민전선 전국위원회와 각 부문별 그리고 지역 단위 인민전선이 설치되었는데, 이것은 대중적 반파시즘 운동 전개를 위한 조직적 기초를 구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회당과 급진당의 반대로 노동자의 독립적인 비정당적 대중조직 기구 구성은 이루어지지 못했죠. 사회당과 급진당은 인민전선의 기관들은 정당대표제에 기초하여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공산당이 제안한 선출제 기관 구성에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정당 대표제 원칙은 그 후 인민전선의 조직 구조가 갖는 취약성의 주요한 요소가 되었죠(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334). 
 
인민전선 정권의 탄생
 
인민전선의 활동이 추진되는 가운데, 1936년 4월에 의회선거가 치러졌습니다. 인민전선을 구성한 주요 3당은 선거 블록을 형성하여 공통 강령을 제시했죠. 이는 전 세계가 당면한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방책으로서 소련이 실험하고 있는 계획경제를 강조했습니다. 강령은 ‘신성동맹’에 대해 압력을 가하고, 공화제를 수호하는 제안을 포함했습니다. 또 강령은 기존의 디플레이션 정책을 비판하면서 실업을 줄이고 노동자계급의 삶의 질을 개선하기 위한 공공사업 계획, 실업수당 인상, 노동시간 단축과 같은 정책을 내놓았죠. 
강령은 농산물 시장에 대해 정부가 개입하여 가격을 인상하는 방법도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무기산업과 프랑스 은행의 국유화를 공약으로 내세웠는데, 이것은 핵심적 보수파 압력집단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죠. 이러한 강령은 사회개혁을 실천하는 동시에 급진당의 지지자들인 프티 부르주아지를 보호해주기 위한 정책들이었습니다.
좌파 정당들의 이런 강령에 대해 보수파의 ‘공포 정치’ 공세도 만만치 않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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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인민전선이 승리한다면 자본의 해외유출이 뒤따를 것이고, 평가절하는 완전 파산으로 이끌 것이며, 무정부 상태가 오면서 전쟁이 발발할 것인데, 이는 인민전선의 배후에 모스크바의 그림자가 숨어있기 때문이다(프라이스, 2001: 313~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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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4월의 1차 선거 결과는 좌파연합에게 그다지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민전선은 542만 표를 획득했는데, 이것은 1932년에 획득했던 것보다 불과 30만 표 더 많을 뿐이었죠. 5월3일 치러지는 2차 투표에서는 당선 가능성이 가장 높은 단일 후보에게 표를 던지도록 유도하는 것이 효과적인 방법이었어요. 그 결과 인민전선은 의석 367개를 확보했고, 우익 정당들은 222석을 획득하는 데 그쳤습니다. 
인민전선은 노동자계급의 지지를 공고히 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중간계급 하층, 특히 남부와 농촌에서 많은 표를 획득했습니다. 비록 유권자의 선택이 인민전선 쪽으로 이동함으로써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 대표를 의회에서 각각 10명과 97명에서 72명과 146명으로 늘렸지만, 이것은 부분적으로 그들의 연합 세력인 급진파를 희생시킨 대가(159명에서 116명으로 감소)였습니다(프라이스, 2001: 314~315).
드디어 1936년 6월4일 레옹 블룸(Léon Blum) Léon Blum(1872. 4.9~1950. 3.30): 파리에서 출생하여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으며, 문학・사회비평가로서 활동했다. 1919년 센 현(縣)의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하원의 지도자가 되었고 좌파 블럭 주역의 한사람이 되었다. 1929년 사회당 당수가 되었고, 1936~1937년 인민전선 내각의 수반이 되어 연립정권을 이끌었다. 비시 정부는 블룸에 대해 독일과 벌인 전쟁에서 패배한 책임을 물어 정계에서 추방했다. 전쟁이 끝난 뒤 1946년 다시 총리 겸 외무부장관에 복귀하여 1947년 1월 물러났다.    
을 수반으로 하는 최초의 인민전선 정권이 탄생했습니다. 내각은 사회당과 급진당만으로 구성되었으며, 공산주의자들은 정부 밖에 남아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기로 약속했죠. 그러나 실제로는 프랑스 공산당이 곧바로 방침을 바꾸어 인민전선이 아주 곤란한 처지에 놓인 시기에 정부 책임을 나누어 가질 용의가 있음을 표명했으나, 사회당과 급진당이 이를 거부했다는 주장도 있다 (Histoire du Parti Communiste Français, Mauel, 1964)
 
그런데 제1차 인민전선 정부의 출범을 바로 눈앞에 두었던 시점인 1936년 5월 중순, 공장 점거를 수반한 전례 없는 대규모 파업운동이 일어났어요. 1936년 1월부터 5월까지는 매월 평균 파업 건수는 약 45건 정도였고, 파업참가자 수는 9,000명에서 많게는 1만 4,000명 정도였습니다. 6월 들어 파업 건수는 1만 2,142건, 파업참가자 수는 183만 938명이었고, 공장 점거 파업 건수는 8,941건(전체 파업 건수의 74%)으로 크게 증가했습니다. 7월의 경우 파업 건수는 1,751건이었고, 파업참가자 수는 18만 1,471명이었죠. Danos, J., et Gibelin, 1970, juin 36. Paris Maspero, 152~153, 문선모, 1990: 123~124, 150에서 재인용.
 
인민전선 정부의 출범을 앞 둔 시점에서 노동자계급이 대규모 파업을 제기하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요? 이와 관련해 제기되는 것은 1920년대의 ‘제2차 산업혁명’ 과정 속에서 기업집중, 기계화, ‘노동의 과학적 조직’ 등에 따른 누적된 불만, 대공황에 따른 더욱 심화된 경제적 고통, 1934년 2월의 정치위기를 계기로 분출했던 진보 세력의 반파쇼투쟁, 인민전선의 성립과 노동조합운동의 통합, 1936년 하원 선거에서 획득한 인민전선의 승리 등입니다. 더구나 노동자들은 이제 자신들의 파업에 대해 더 이상 이전과 같이 물리력을 동원한 진압은 없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되었고, 그러한 전망이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파업이라는 직접 행동으로 나서게 했던 추동력으로 작용했죠(문선모, 1990: 124, 143).
1936년 5~6월 파업은 몇 가지 주요 특징을 나타냈습니다. 5~6월 파업운동은 역사상 유례없는 폭발성을 드러냈고, ‘근대적 공장 프롤레타리아트’가 파업 참가자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공장 점거라는 새로운 투쟁 형태를 취했죠. 파업운동에서 제기된 요구는 경제적 요구와 노동조합 권리에 집중되었지만, 대규모 파업투쟁은 어차피 정치적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었습니다. 
5~6월 파업 투쟁은 괄목할만한 성과를 가져다주었어요. 노동조합과 기업주 단체 사이에 체결된 ‘마티뇽 협정’은 임금인상을 비롯한 노동조건 개선과 노동조합의 기본 권리를 보장했습니다. 뒤이어 인민전선 정부는 주 40시간 노동일제와 유급휴가제, 단체교섭권의 보장과 단체협약 효력 확장제도 도입, 사회보험제도의 개선을 위한 입법화를 추진했습니다. 
5~6월 파업운동은 인민전선 정부나 노동자계급에 대해 조금도 양보의 의사가 없었던 기업가들을 굴복시킴으로써 블룸 정부가 사회・경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주었죠. Lefranc, G., 1974, Histoire 여 Front populaire, Paris: Payot, 310, 문선모, 1990: 200에서 재인용.
 이 밖에도 5~6월 파업투쟁 과정에서 노동자계급은 의식 향상과 조직의 확대 및 강화를 이룩할 수 있었고, 사회당과 공산당의 조직 역량이 신장된 것도 파업운동의 성과로 지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티뇽 협정 체결
 
5~6월 파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1936년 6월 7~8일에 걸쳐 정부의 중재로 CGT와 프랑스 생산총연맹(Confédération Générale de la Production Française: CGPF)은 오텔마티뇽(Hôtel Matignon: 파리의 총리 공관)에서  ‘마티뇽 협정’을 체결하였습니다. 협정은 7개 항으로 되어 있으며, 그 주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단체협약 즉시 체결, 둘째, 노동조합 가입의 자유로운 의사와 권리 인정, 셋째, 임금인상은 노동자들의 임금수준에 따라 7~15% 내에서 결정하고 각 공장은 총 12%를 넘지 않을 것, 그리고 지역별 또는 범주별로 최저임금 선을 정하여 ‘비정상적으로 낮은 임금’을 재조정할 것, 넷째, 종업원 10인 이상 공장에서는 노동대표제를 확립하여 노동조건에 대한 노동자들의 개별 요구사항들을 수시로 기업가에게 전달하도록 하는 한편, 각종 노동관계 법령의 준수 여부를 감시하도록 할 것, 다섯째, 파업권을 인정할 것, 여섯째, 노동총연맹 대표위원회는 위의 협정들을 인정하고 그 적용을 위한 개별 협상에 들어가는 시점부터 노동자들에게 조업 재개를 명할 의무를 질  것 등입니다. 
마티뇽 협정은 1918~1919년에 유럽 노동조합운동이 획득하였던 중대한 성과를 떠올리게 하는 노동자계급의 보기 드문 승리였어요. 이 협정은 한꺼번에 노동조합 전국중앙조직의 영향력을 크게 신장시켰으며, 작업장 대표를 제도화했고, 인민전선 정부로 하여금 사회개혁을 서둘도록 이끌었죠. 
그것은 새로운 출발일 수도 있었습니다. 이 새로운 출발은 세 가지 계기를 수반하였죠. 첫째, 프랑스 노동조합운동의 약진입니다. 노동조합 전국중앙조직은 국가적 차원에서 정당한 발언권을 획득하였습니다. 또 노동조합 조합원의 수도 1년 만에 전례 없는 규모로 확대되어, 파업 시작 당시 약 77만 8,000명이던 것이 1937년 3월에는 400만 명에 이르렀죠. 
둘째, 인민전선 정부가 사회개혁에 대한 정치적 의지를 나타냈습니다. 우익집단을 불법화하였고, 애초에 내세운 강령을 바로 실천에 옮겼죠. 
셋째, 노동자계급과 진보 정치세력이 사회・정치적으로 크게 진출하였습니다. 1936년 7월14일 열린 집회에서는 100만 명이 운집한 가운데 거리 행진을 거행하였고, 유급휴가 제도에 따라 지방과 해변으로 몰려가게 된 노동자들은 기존의 사회적 특권 지형을 흔들어놓았습니다(일리, 2008: 492~493).
마티뇽 협정의 체결에도 5~6월 파업운동은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어요. 마티뇽 협정이 곧바로 효력을 갖고 전국의 모든 기업들에서 다 같이 시행될 수 있는 법령과도 같은 것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파업운동은 노동 관련 법안들이 국회를 통과하고 금속산업의 단체협약이 채결되었던 6월12일을 고비로 빠르게 진정 국면에 들어갔죠(문선모, 1990: 191).
인민전선 정부는 마티뇽 협정을 바탕으로 하여 국정 개혁 프로그램을 6월20일 국회에서 통과시켰습니다. 유급휴가(연 2주간)에 관한 법률, 주 40시간 노동법, 의무적 단체협약법이 채택되었고, 고령자와 상이군인의 연금보장이 개선되었으며, 공공사업비가 증액되었고 실업보험제도가 개선되었습니다. 
프티 부르주아지의 이해관계에 맞는 법률도 제정되었어요. 농민・소상인・수공업자에 대해서는 특별융자제도가 도입되었고, 이들에게는 납세 유예가 인정되었죠. 농민들을 위해서는 농산물 매입 가격이 인상되었습니다. 프랑스 은행의 개혁이 법률화되었는데, ‘200 가족’의 권리가 제한되었고, 새로 창설된 은행 이사회에 정부와 경제 그리고 사회단체의 대표가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군수산업의 최대 기업을 국유화하는 법률이 제정되었죠. 그리고 6월18일 정부는 이전에 공포했던 파시스트 단체 금지에 관한 법률을 재확인하였습니다(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335). 
인민전선 정부의 권력 장악과 5~6월 총파업, 그리고 마티뇽 협정 체결 등은 인민대중의 정치 역량 성장을 촉진함과 동시에,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새롭고도 복잡한 임무를 제기하였습니다. 그것은 극좌주의와 개량주의 편향을 극복하는 일이었죠. 
더욱이 1936년 5~6월에 결행된 총파업 승리는 일부 노동자들 사이에 ‘이제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극좌적인 선동에 영향을 받는 위험스러운 인식을 낳게 하였습니다. 이러한 선동은 노동자계급을 노동자계급이 아닌 동맹자들로부터 고립시키고, 결국에는 패배를 안겨주게 될 뿐이었죠. 프랑스 공산당은 마티뇽 협정 체결 후 노동자들에게 파업 중지를 호소하였습니다.  
한편, 대중투쟁을 개량주의적으로 과소평가하는 경향도 극복의 대상이었어요. 인민전선 정부 성립과 최초의 성공은 노동자들 일부 사이에 이 정부의 권력 장악에 따라 마치 대중투쟁이 불필요하게 된 것처럼 인식하는 개량주의적 환상을 낳기도 하였습니다. 인민전선 정권 체제에서도 노동운동을 비롯한 대중투쟁은 자기 책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죠.
인민전선 정권의 집권과 정책 시행이 진행되는 가운데, 인민전선 내부 노선 대립과 복잡한 국제정세는 인민전선의 활동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어요. 더구나 인민전선 정부의 경제정책과 대외정책에 관한 문제 해결이 중대 과제로 떠올랐습니다. 경제적으로 환(換)관리가 구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방대한 자본이 해외로 유출되었고, 마티뇽 협정의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한 기업주들의 노력은 사회적 긴장을 증대시킴과 동시에, 국제 경쟁력의 약화를 가져와 국내에서 인플레이션을 유발하였죠. 9월에 정부가 막겠다고 약속한 프랑화의 평가절하(약 30%)는 피할 수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또 제2차 세계대전 직전의 복잡한 국제정세, 스페인 내전과 이탈리아・독일의 프랑코에 대한 군사지원을 둘러싸고 인민전선을 구성한 각 정당 사이의 의견 불일치는 인민전선의 활동을 혼란 상태에 빠트렸습니다. 더구나 스페인 내전 ―1936년 2월15일의 선거를 통해 출범한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에 대항해 1936년 7월17~18일에 일어난 프랑코의 쿠데타로 시작되었다.― 은 인민전선 정부의 내부 분열을 키웠죠.  
 
한편,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인민전선이 선거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국가 사이의 동맹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스페인에서 일어난 쿠데타는 유럽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서 반파시즘 연대를 가져오기도 하였죠. 스페인 인민전선 정권에 대한 지원이야 말로 블룸 정부가 추구해야 할 우선 과제였다.
그런데도 블룸은 프랑스와 스페인 사이의 군사계약을 존중하기보다는 프랑스 외무부와 영국 정부, 행정부 내의 급진당 인사, 우익 언론 등의 압력에 굴복하여 군사원조를 중단하고, 그 대신 이탈리아와 독일이 프랑코를 지원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국제적인 ‘불간섭 조약’을 내세웠어요. 이러한 결정은 스페인 공화국에 대해서는 재앙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이 결정은 프랑스 인민전선의 토대를 뒤흔들었죠. 이 결정은 공산당과 진보 단체들의 심한 비판을 불러일으켰습니다(일리, 2008: 496).
인민전선 내부의 대립은 인민전선 정부의 경제정책을 둘러싸고도 발생하였죠. 블룸 정부는 신용을 회복하고 급진당 협력자들과 조성된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노력으로 1937년 1월 정부의 사회개혁 계획을 ‘잠시 중단’한다고 선언했습니다. 블룸은 계속되는 재정 상태의 악화를 해결하기 위해 비상권력을 요청하였죠. 블룸의 요청은 하원에서는 통과되었으나 상원에서 결국 부결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블룸은 1937년 6월20일 사임했습니다(프라이스 2001: 317~318). 
 
<다음 호에 계속>
  • 제작년도 :
  • 통권 : 제16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