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체제 아래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노동사회

민주주의 체제 아래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구도희 0 3,888 2014.05.09 11:49
 
한국에 민주주의가 없었던 군사독재 시절, 민주주의란 그 말만 들어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동을 주는 단어였다. 민주주의의 실현은 역사와 시대의 사명이었으며 많은 청춘과 생명들은 이 정치적 권리를 얻기 위해 온 몸을 던져 희생했다. 이 시절 한국에서의 민주주의란 억압적인 정치 과정에서 과대 성장한 국가와 왜소한 시민사회 간의 정치적 균열이었다. 그리고 개발 독재와 노동·민생 간의 경제적 균열, 아울러 친일․반민족․분단세력과 자유․진보․통일세력 간의 역사적 균열과 대립을 채워 줄 수 있는 최후의 보루였다. 그러한 열망은 어두운 시대를 밝히는 등불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한 시절 목숨 같이 귀했던 민주주의에 대해 어느 때부턴가는 소 닭 보듯 맹숭맹숭하고 무관심한 듯한 인상을 받는 것은 왜일까? 오늘날 민주주의란 이미 쟁취된 그 무엇이라 뭘 더 바라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고, 갈수록 먹고 살기 힘들어지는 세상에서 밥 한술이라도 더 떠먹고 사는데 도움을 주는 것 같지도 않다면, 굳이 이것이 내 삶에 어떤 필요가 있는지 의문이 드는 것이다. 
빈부의 격차, 높은 대학등록금, 취약한 사회복지, 장시간 노동, 구조조정,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문제 등 개개인들이 몸으로 부딪치는 열악한 생활 여건은 생존의 문제 그 자체다. 그런데 민주주의라고 하는 현재의 정치제도가 이런 내 문제를 얼마만큼 해결해 줄 수 있는지 자문한다면, 내가 민주주의에 별 기대를 안 하는 것도 당연한 현상이 아닌가 한다.  
즉 한국에서의 민주주의란 정치권의 고상한 그것과 일반 생활인들이 체험하는 절박한 그것 간에 괴리된 채 서로 만나지 못하는 어정쩡한 모습이다. 그런데 제도권 정치라는 것은 이런 나의 서민적이고 생존에 대한 희망사항들을 담아낼 것 같지 않다. 그러다 보니 제도권 정치는 제도권 정치대로 따로 놀고, 나는 또 나대로 먹고 살기 위해 입시와 취업, 직장 안에서의 복종과 경쟁에 더욱 매달린 채 재미없고 희망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견뎌낼 뿐이다.  
더구나 과거 민주주의를 탄압하고 반대했던 정치세력들은 전향이라도 한 것인지 오늘날 죄다 민주주의자 행세를 하고 있으니 이쯤 되면 모두가 다 민주주의자라 누가 내 적인지, 누가 내게 거짓말을 하는지도 헷갈린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란 이제 누구나 들고 다니며 애용하는 스마트폰 정도가 되어 버려서 ‘민주주의를 더 얻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말 자체가 뭔가 괴상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왜 민주주의의 진전을 요구하는가?
그러니까 오늘날 한국사회의 민주주의는 노동의 정치세력화라는 진보정치세력의 부재 탓에서 오는 위기와 더불어, 민주주의 특유의 무정부성에서 오는 욕망의 폭주와 가치의 부재 혹은 역설적으로 모든 가치의 허용에서 오는 민주주의의 위기 문제를 함께 안고 있다.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라는 책은 바로 이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문제적 발상에서 출발한다. 이 책은 민주주의가 무엇이고, 우리가 민주주의에 담아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민주주의적인 주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다룬 사상가 여덟 명의 짧은 논문들을 엮었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단지 누구에게나 허용하는 무한한 부의 경쟁을 위한 공정한 규칙 정도일까? 아니면 평등에 대한 집착에서 기인해 사회를 똑같은 생각과 제도로 통합하려는 전체주의적인 발상 정도일까? 
책의 내용 중 민주주의적 삶을 사는 우리의 모습을 철저히 묘사하고 있는 한 대목을 인용해 본다. 
“민주주의적 인간은 순수한 현재만을 산다. 스쳐가는 욕망은 법이 된다. 오늘은 기름진 진미를 술에 곁들여 먹고, 내일은 부처를 위해 금식하고 청정수를 마시며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한다. 월요일엔 고정식 자전거 위에서 여러 시간 페달을 밟으며 다시 몸을 만들고, 화요일엔 온종일 자다가 일어나서는 담배 피우며 진수성찬을 먹어댄다. 수요일엔 철학책을 읽겠다고 선언하고는 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며 책장을 덮는다. 목요일엔 점심을 먹으며 정치를 논하다가 흥분해서는 상대의 의견에 격분해 가슴을 벌렁거리고, 격앙된 채 소비사회와 스펙터클의 사회를 비난한다. 저녁이 되면 영화관에 가서 중세의 전투장면이 나오는 허접한 블록버스터를 본다. 집에 돌아와서 잠자리에 들 땐 예속된 인민들의 무장해방에 가담하는 꿈을 꾼다. 그 다음 날엔 과음한 탓에 목이 칼칼해져 일터에 나가서는 옆 사무실 비서에게 수작을 걸며 삽질을 해댄다. 맹세하건데 그는 사업에 뛰어들 것이다! 그에게 부동산 수익이 떨어질 것이다! 그런데 주말엔 또 위기이다. 다음 주가 되면 이 모든 것을 보게 되리라. 어쨌든 이런 게 삶이다! 질서도 없고 생각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즐겁고, 행복하며, 무엇보다 의미 없지만 그만큼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다. 무의미에 대한 대가로 자유를 지불하라, 그건 별로 비싼게 아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사실 플라톤의『국가』8권에서 플라톤이 민주주의의 타락상을 비판한 대목을 알랭 바디우(Alain Badiou)가 현대적 언어로 약간 과장되게 번역한 것이다. 2천 년 전의 플라톤이 현대적 삶을 살고 있는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엿보기라도 한 것일까? 민주주의에 대한 고민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을 다시 한 번 반성하는 계기가 된다. 
 
우리는 민주주의 체제 아래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화폐소유자로서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 나는 노동력 상품의 판매자로서 가변자본이 되어 타인에게 지속적으로 삶과 잉여가치를 전유하게 한다. 나는 노동력 판매를 통해 취득한 화폐로 다시 타인의 노동을 나에게 예속시키고 소유하려는 삶을 추구하는 것인가? 이런 삶은 화폐소유자로서의 노동자와 화폐소유자로서 자본가라는 측면에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평등한 삶이다. 여기에는 오로지 화폐의 등가성에서 오는 추상성만이 삶의 척도가 된다.  
민주주의란 이렇듯 욕망의 폭주와 이 모든 욕망을 허용하는 데서 오는 욕망의 등가성 그리고 가치의 부재라는 문제가 암초처럼 도사리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이 문제는 우리들 각자가 한 번씩 깊이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이 작은 책과 함께 그 고민의 첫걸음을 떼보면 좋겠다.         
 
  • 제작년도 :
  • 통권 : 제17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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