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1938년 들어 프랑코는 군대 전체의 절대적인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그 자신이 (하느님과 역사에만 책임을 지는) ‘국민 운동’의 최고 지도자가 되고 나서, 처음 시기의 ‘기술위원회’를 정식 정부로 대체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습니다. 1월30일 프랑코는 부르고스에서 첫 번째 내각을 구성하여 발표하고, 국가중앙행정법을 제정했습니다. 이 법에 따르면, 국무회의 의장은 국가수반을 겸하게 되어 있고, 장관들은 국가수반과 국가 체제에 충성을 서약해야만 했습니다. 또 국가수반은 “보편적 성격을 지니는 법률을 제정할 수 있는 최고 권력”까지 갖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국가수반이 입법, 사법, 행정의 전권을 독점하는 것을 의미했죠. 국가수반인 총통은 프랑코가 맡았으며 중요 부서인 국방부, 치안부, 외교부 장관직은 모두 장군들이 차지했습니다. 이들 장관과 그들의 부서들은 단순히 총통 휘하 사령부의 연장일 뿐이었어요(Veevor, 2006: 340). 프랑코는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폐지했으며, 노동관계법을 개정하여 계급투쟁의 소멸을 규정했고 철저하게 통제된 경제정책을 강요하는 규정들을 설치하였습니다. 또 출판법을 제정하여 모든 간행물은 프랑코의 정책에 동의해야 한다고 규정하였습니다.
2월 들어 프랑코군이 독일과 이탈리아 공군의 지원을 받아 테루엘을 무차별 폭격을 한 끝에, 2월22일 다시 탈환했습니다. 혹독한 추위에다 시가전까지 벌어졌던 테루엘 전투는 대단히 참혹한 전투였습니다. 반란군 사상자는 4만 명에 이르렀으며, 그 가운데 4분의 1은 동상 때문이었습니다. 공화군 측의 손실은 이보다 더 심해 약 6만 명의 사상자가 났습니다.
프랑코군이 테루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내전 상황은 파시스트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습니다. 프랑코군은 3월9일 지상과 공중 양쪽에서 동시에 폭격을 퍼부으면서 대규모로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반란군은 카스페를 점령하고 아라곤 지역을 공격하여 공화군 전선을 갈라놓았어요. 반란군은 4월에 레반테 지역으로 공격을 시작하여 레리다를 점령하였고, 4월 15일 지중해 연안의 바라로스에 진출했습니다.
<악기를 연주하는 공화군 해병>
한편, 공화 진영에서는 4월 6일 아사냐가 다시 한 번 네그린에게 정부 구성을 요청했습니다. 그 정부는 ‘전쟁 정부’로 표현되었지만, 실제로는 인민전선을 다시 부활시키려는 의도의 ‘통합 정부’를 지향했죠. 새 정부는 겉으로는 정치적 통합을 강조했지만, 실제 권력은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했어요.
4월16일에는 영국과 이탈리아 사이에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이 조약 내용 가운데 스페인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게 될 조항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탈리아 군대가 스페인에 주둔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스페인 공화 정부는 이 조약 체결에 충격을 받았어요. 조약이 체결되고 나서 2주일 뒤 네그린은 외교 공세를 폈으나 별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죠.
4월30일, 네그린은 자유선거를 통해 일종의 관리정부를 설립하기 위한 ‘13개 조항’을 국무회의에 제출했습니다. 그것은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 세계 모든 나라에 고하는 하나의 선언’ 형식이었으나, 실제는 평화 협상을 위한 한 가지 방식으로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13개 조항은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작성한 것으로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스페인의 절대적 독립과 통합 보장.
② 외국 군대로부터 스페인 영토 해방.
③ 민주주의 원칙에 기초한 인민의 공화국과 국가의 수호.
④ 종전에 잇따른 국민투표 실시.
⑤ 스페인의 통일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여러 민족의 문화 보호와 장려.
⑥ 시민들의 권리 존중: 양심과 종교 의식의 자유.
⑦ 법적인 재산과 외국 자본 존중.
⑧ 지방에서 충실한 농업 개혁과 민주주의 시행.
⑨ 노동자 권리 보장을 위한 진보적인 사회입법.
⑩ 국민들의 신체․도덕적 문화 개선.
⑪ 군대를 정당에서 독립시키고 인민의 기구로 대체.
⑫ 국가 정책의 한 방편으로 전쟁 포기.
⑬ 모든 스페인 사람들에 대한 폭넓은 사면(Veevor, 2006: 338~339).
공화 정부가 제의한 13개 조항에 대해 프랑코는 “스페인에서 타협을 통한 해결에 털끝만큼도 관심이 없다”면서 “스페인의 국민 진영 모두는 스페인의 운명을 다시 한 번 적색분자들이나 민주주의 정부에 맡기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공화 정부의 평화 협상을 거부한 프랑코는 기동군을 카탈루냐의 수도를 공격하는 데 투입하는 대신, 바다와 아라곤을 연결하는 회랑 지역을 더 확대하는 데 투입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반란군에게 남서쪽, 즉 발렌시아 쪽으로 내려가도록 명령했어요. 반란군과 공화군 사이에 격전이 벌어졌습니다. 그러나 반란군의 진격은 결코 용이하지 않았어요. 방어선을 확실하게 구축한 공화군의 대응을 깨뜨리기는 어려웠죠.
6월에는 반란군이 해안선을 따라 서서히 전진했습니다. 반란군은 6월13일에는 카스테욘데라플라나를, 그 다음날에는 비야레알을 점령했습니다. 그러나 공화군이 에스파단 산맥에 진을 치고 완강히 저항하자 국민군은 공격 목표로 삼았던 세르고베―사군토 전선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반란군 지휘관들은 공화군의 강력한 저항과 사상자 수의 증가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7월13일부터 프랑코의 지시에 따라 발렌시아 점령을 목표로 집중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공화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끝내 작전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7월23일 프랑코군은 카스투에라를, 그 다음날에는 돈베니토와 비야누에바데라세레나를 각각 점령했습니다.
공화군은 봄에 아라곤에서 참패한 뒤, 고립된 동쪽 지역(카탈루냐)으로 후퇴한 잔여 병력으로 부대를 재편성하는 일에 착수하였습니다. 공화군은 또 3월부터 6월 중순사이에 프랑스 국경을 통해 들여온 1만 8,000톤가량의 전쟁 물자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늦은 봄과 초여름 동안에 내린 징집명령에 따라 소집된 병력으로 12개 사단이 신설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정황을 배경으로 하여 공화 진영은 바다로 통하는 반란군 회랑 지역을 재탈환함으로써 분리된 두 공화군 지역을 다시 연결하려는 전략을 세웠어요.
7월25일 에브로 강 도강 계획에 따라 공화군 6개 사단이 에브로 강을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반란군의 공격을 받아 병사 1,200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로부터 8월과 9월에 걸쳐 반란군은 네 번에 걸친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였고, 9월19일부터 26일 사이에 산맥의 고지들을 하나하나 점령하기 시작했습니다. 11월16일 새벽 4시, 강 연안에 짙은 안개가 깔린 틈을 타 공화군의 마지막 남은 병력이 철교를 이용하여 에브로 강을 다시 건너갔습니다. 전투가 시작된 지 꼬박 113일 만이었어요. 패잔병들은 자신들이 전투 이전, 그러니까 7월24일에 속했던 진지로 돌아갔습니다. 에브로 강 전투에서 프랑코군 사상자는 6만 명 정도였고, 공화군 사상자는 7만 5,000명 정도였습니다. 그 가운데 전사자는 3만 명에 이르렀어요.
에브로 전투가 진행되는 가운데, 1938년 9월30일에는 뮌헨 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이 협정은 공화 정부에 대해서는 심각한 타격을 안겨주었어요. 유화 정책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이 협정은 스페인에 대한 영국의 기존 정책에 아무런 변화가 없음을 확인시켜주었고, 스탈린이 히틀러와 화해하는 것이야 말로 소련에 이익이 된다는 생각을 굳히게 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죠. 사실 그때까지 영국과 프랑스가 스페인 내전에 참전할 것이라고 기대한 것은 공화 정부의 착각이었어요. 또 소련의 스페인 공화 정부에 대한 지원은 이제 난처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한편, 네그린은 9월21일 국제연맹에서 국제여단의 무조건 철수를 선언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1938년 9월 무렵 국제여단에 남아 있던 외국인은 7,102명에 지나지 않았어요. 외국인 지원병들이 전선에서 철수하기 시작한 지 7주가 지난 10월28일, 국제여단 병사들은 바르셀로나 디아고날 거리를 지나는 송별 퍼레이드 행사를 위해 한 자리에 모였습니다. 시가지에는 30만 명의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라 파시오나리아는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습니다.
“국제여단 동지들이여! 정치적 이유, 국가의 이유, 그리고 당신들이 한없이 고귀한 피를 아낌없이 바쳤던 바로 그 명분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해 이제 여러분은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고국으로 돌아가지만 어떤 분들은 다른 나라로 망명을 떠나야 합니다. 여러분, 자랑스럽게 돌아가십시오. 여러분은 역사입니다. 여러분은 전설입니다. 여러분은 민주주의 세력의 연대와 통일의 영웅적 모범입니다. 우리는 결코 여러분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평화의 올리브 나무가 다시 잎을 틔울 때, 그리고 그 잎사귀들이 스페인 공화국의 승리의 월계수와 뒤섞여 하나가 될 때 다시 돌아 오십시요! ”
국제여단 병사들은 9,934명의 주검과 7,686명의 행방불명자를 뒤로하고 떠났으며, 부상자는 3만 7,541명에 이르렀습니다. 스페인에서 복무한 공산주의자 가운데 상당수가 제2차 세계대전 중 또는 전쟁 후에 자기 나라로 돌아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요시프 브로즈(티토)와 발터 울브리히트 등이 그 대표적인 사람이었죠.
이 무렵의 내전 상황을 보면, 에브로 전투가 끝난 뒤 12월 초 반란군은 공화군이 주둔하고 있는 북동부 지역의 에브로 강과 세그레 강 경계선을 따라 기동군을 재배치했습니다. 공화군 참모부는 이러한 상황을 예상하고 카탈루냐 방어를 준비하였고, 반란군은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해 서쪽과 남쪽을 공격할 계획을 세웠어요. 세그레 강 쪽에 반란군 병력이 엄청난 규모로 집결하자 공화군 참모부는 서쪽과 남쪽에 대한 견제 공격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12월8일 공화군은 코르도바―페냐로야 전선에서 세비야 쪽으로 진격했습니다.
〈1939년〉
1939년 1월3일에는 솔차가의 카를로스파 군대가 진격을 거듭하여 에브로 전선에서 후방으로 50킬로메터 떨어진 보르하스블랑카스―몬트블랑크 사이의 도로에 이르렀습니다. 야구에의 군대는 에브로 강을 건너 아스코 맞은편에 교두보를 세웠어요. 반란군은 1월5일 보르하스블랑카스를 함락했고, 같은 날 아르테사를 점령하였습니다. 그 다음날인 1월6일에는 솔차가 장군의 군대가 비나이샤를 점령했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월26일 야구에 장군이 바르셀로나를 점령한 뒤 공화군을 추격하여 2월2일 히로나를 점령하고 프랑스 국경에 도달함으로써 카탈루냐 전투는 끝났습니다.
바르셀로나가 점령되던 날의 광경은 참으로 처참했어요.
“1월 26일에는 제5열, 즉 2년 동안 숨어 지내던 우익 분자들이 그 동안의 원한을 갚으려고 거리에 나타났다. 그들은 도시로 들어오는 국민군 선발대와 뒤섞였다. 선발대, 특히 야구에가 이끄는 모로코인 레굴라르들은 소유자가 우파인지 좌파인지에 상관없이 며칠 동안 도시에 있는 가게나 아파트를 약탈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것은 그들이 거두는 ‘전쟁세’였다. 공화군은 도시가 함락되기 전에 감옥에 갇힌 죄수를 대부분 석방했다. 그러나 국민군과 그들의 지지자들은 도시를 ‘해방’하고 나서 닷새 동안에 약 1만 명을 살해했다.”
바르셀로나가 점령당한 뒤, 공화군 일부 부대들은 몬체크를 방어하기도 하고, 한쪽 진지에서 다른 진지로 후퇴하면서 저항하기도 했으며, 또는 매복하고 있다가 추격자들을 기습 공격하는 방법으로 전력을 다하여 후위 활동을 벌였습니다.
2월1일 피게라스 성 마굿간에서 코르테스가 소집되었습니다. 의원 473명 가운데 겨우 64명이 참석했어요. 네그린은 개막 연설에서 평화협상을 위한 세 가지 조건을 내놓았습니다. 첫째, 모든 외세의 개입으로부터 스페인을 독립시킨다는 것, 둘째, 스페인 국민들이 정부 형태를 결정할 수 있도록 국민투표를 실시한다는 것, 셋째, 전쟁이 끝난 뒤 어떠한 보복과 정치적 탄압도 하지 않겠다는 것을 약속하는 것이었습니다. 프랑코는 마지막 두 가지 사항에 대해서는 결코 긍정하는 대답을 하지 않았어요.
2월5일 네그린은 대통령 아사냐 부부, 마르티네스 바리오, 히랄, 콤파니스, 아기레와 함께 국경선을 넘었습니다. 이들은 파리에 있는 스페인 대사관에 머물기 위해 거기로 갔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1월28일 민간인에 한하여 국경을 개방하지 않으면 안 되었죠. 2월5일 프랑스 정부는 인민군 패잔병들의 입국을 허락했습니다. 1월28일 이후 모두 50만 명가량이 국경을 넘었습니다(Veevor, 2006: 382).
2월27일 영국과 프랑스 정부는 부르고스에 있는 프랑코 진영 정부를 공식으로 인정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무엇보다도 나치 독일의 위협이 점점 가시화되고, 유럽에서 전쟁 가능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군대나 무기를 다른 데로 분산할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어요(Veevor, 2006: 386).
그 다음날인 2월28일 아사냐는 공화국 대통령직을 사임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후임자를 선출하기 위한 의회가 소집될 때까지 임시로 그를 계승할 의무가 있는 코르테스 의장 디에고 마르티네스 바리오에게 자신의 의사를 전했습니다.
이처럼 스페인 내전이 막바지에 접어든 시점에서 예기치 못한 사건이 일어났어요. 세히스문드 카사도의 쿠데타였죠. 3월3일 네그린 총리가 관보에 군대 진급자 명단과 새로 고위직을 맡을 공산주의자들의 명단을 발표하자, 3월5일 카사도를 비롯한 쿠데타 음모자들이 장교들의 조직체인 ‘국방위원회’를 주축으로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네그린과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체제보다는 프랑코로부터 더 나은 항복조건을 얻어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2월부터 쿠데타 계획을 추진해 왔던 것이죠.
3월12일에는 마드리드 한복판에서 카사도가 이끄는 군대와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전투는 3월12일 일요일 메라의 병력이 공산주의자들의 군대를 제압하면서 끝났고, 공산주의자들은 결국 휴전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3월13일 카사도는 프랑코에게 전쟁을 끝내기 위한 협상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카사도는 민간인이든 병사이든 아무런 보복도 하지 말 것과 스페인을 떠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25일의 여유 기간을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프랑코는 엿새 뒤에 날카롭고 차가운 어조로 회답을 보냈어요. “협상도, 국민 진영에 적군 사령관이 주둔하는 것도 인정할 수 없다. 무조건 항복만이 있을 뿐이다.”
3월 26일부터 반란군 부대들이 전 방위에서 마드리드로 진격해 들어갔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공화군 전선은 스스로 무너졌습니다. 반란군 부대들은 주요 항구들을 장악했어요. 30일에는 바렌시아와 알리칸데를, 31일에는 알메리아, 무르시아, 카르타헤나를 장악했습니다. 4월1일 드디어 프랑코가 부르고스에서 공화국 정부가 항복하였음을 선언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스페인 내전은 끝이 났습니다.
스페인 민족․혁명 전쟁이라고도 성격 규정을 하는 스페인 내전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영국의 전쟁사학자이자 『스페인 내전』의 저자인 비버는 그의 저서 끝머리에서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스페인 내전은 무엇보다 인간적 측면에서 가장 잘 기억될 것이다. 즉 신념의 충돌, 잔인성, 관용과 이기심, 외교관들과 장관들의 위선, 이상의 배신과 정치적 책략, 그리고 무엇보다도 두 진영에서 싸운 사람들의 불굴의 용기와 자기희생 등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나 역사는 결코 깔끔하지는 않지만, 언제나 질문으로 끝나야 한다. 결론을 내리는 것은 지나치게 편의적이다”(Veevor, 2006: 432). 그러나 결론에 해당하는 논의는 언제나 필요합니다.
프랑코 진영의 반란군은 승리했고, 공화 진영은 패배하였습니다. 공화 진영 패전의 직접적 원인은 전력의 열세에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란군 진영에 대해서는 독일과 이탈리아가 병력과 각종 무기, 그리고 전략․기술 등 대폭적인 군사 지원을 한 반면, 공화국 진영에 대해서는 영국과 프랑스 등 반파시즘 국가들의 군사 지원은 매우 소극적이었기 때문이죠. 독일과 이탈리아는 파시스트 블록 형성이라는 명확한 목적이 있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영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스페인 공화제를 공산주의의 트로이 목마라고 보았기 때문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어요. 반면에 반란군에 대해서는 그들이 영국의 스페인 투자를 잘 보장해 줄 것이라고 보아 호의적인 자세를 보였어요. 영국과 프랑스 모두 나치즘과 파시즘이 유럽 민주주의에 미치는 위협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죠(레이몬드 카 외, 2006: 326).
스페인 내전에 대한 평가는 관점에 따라 매우 다양합니다. 먼저 일리는 “슬픔과 패배만이 스페인 내전의 교훈은 아니었다”면서 스페인 내전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스페인 내전의 상징이 된 게르니카는 잔학행위의 현장(1937년 4월26일 독일의 콘도르 비행단이 도시에 폭탄을 퍼부어 폐허로 만들었다)으로서만이 아니라 공화국의 대의를 위한 예술적 창조성의 가장 유명한 사례인 피카소의 그림으로서도 상징이 되었다. 진보세력에게 공화국은 인간적이고 진취적인 가치의 옹호자이자 더 나은, 더 평등한 세계의 미래상을 높이 들어 올릴 수 있는 장소를 상징했다.……파시즘의 확대에 반대하고 나가서 맞서 싸우지 않으면, 파시즘의 범죄를 묵인하고 세력을 확대하도록 내버려두는 죄를 짓는 셈이었다”고 술회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스페인은 고귀한 대의이자 유럽이 파시즘으로 표류하는 사태를 저지할 수 있는 기회였고, 오든의 시 표현처럼 “우리의 생각이 육신을 얻은” 장소이자 “우리의 열기가 위협하는 모양이 명확히 보이고 생생한 것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일리, 2008: 506~507).
코민테른의 표현에 따르면, 스페인 내전은 가장 넓은 사회적 기반에 근거한 반 파쇼투쟁의 필수적인 부분이었어요. 그것은 민중혁명이었고 민족혁명이었고 반파쇼 혁명이었죠(Hobsbawm, 1996―3: 162~163).
트로츠키의 평가는 코민테른의 그것과는 사뭇 다릅니다. “지난 2년 동안 공화주의 도당에 대한 농민과 노동자의 증대하는 불신과 증오를 목격했다. 절망이나 활력을 잃은 무관심이 차츰 혁명적 열정과 자기희생 정신을 대체했다. 대중은 자기를 속이고 유린한 자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이것이 공화국 군대가 패배한 근본적 원인이다. 스페인의 혁명적 노동자에 대한 기만과 학살을 고무한 자는 스탈린이었다. 스페인 혁명의 패배는 이미 오점 투성이인 크렘린 일당에 지워지지 않는 새로운 오점을 하나 더 추가하는 것이다. 바르셀로나의 붕괴는 세계 노동자계급에게 끔찍한 타격을 가하는 것이지만, 중대한 교훈을 가르쳐주는 것이기도 하다. 피착취 대중에 대한 기만과 배신의 조직적 체계인 스페인 인민전선의 메커니즘은 철저하게 폭로되었다”(트로츠키, 2008: 360~361). 트로츠키는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 진영이 패배한 원인을 스탈린과 인민전선에 돌렸어요.
스페인 노동자계급의 반파시즘 투쟁과 새로운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투쟁의 의의는 결코 과소평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스페인 노동자계급은 유래를 찾기 어려운 광범하고도 결의에 찬 국제연대운동을 바탕으로 국제파시즘에 대한 무장저항을 처음으로 결행하였습니다.
스페인 공산당 지도자 이바루리는 스페인의 인민전선 투쟁을 “보다 광범한 조직……그것은 모든 민주주의 계층의 통일된 혁명적 의의를 확인한 고전적 사례였다”고 평가했습니다. 스페인 노동자계급의 경험은 진보세력과 인민들이 반파시즘 투쟁과 민주주의 혁명을 위한 전략과 전술을 수립하는 데서 중요한 교훈을 제공했어요. 또 스페인 노동자계급의 경험은 새로운 정치 형태, 즉 ‘인민적’ 또는 ‘국민전선적’ 정부 또는 ‘새로운 유형의 민주공화제’라는 국가권력의 특수한 성격에 대한 명제를 제기했죠(the USSR Academy of Sciences, 1985 Volume 5: 350).
4. 프랑코의 파시즘 체제
<독재체제를 강화한 프랑코>
1939년 5월19일 반란군 진영 스페인의 승리를 축하하는 대규모 퍼레이드가 총통 가도로 이름이 바뀐 마드리드 카스테야나 대로에서 열렸습니다. 프랑코는 이제 스스로 스페인의 주인이 되었어요.
8월8일 프랑코는 정치적 권한을 더욱 강화하기 위한 조치로서 ‘국가수장법(國家首長法)’을 채택했습니다. 그것은 국가 비상시 자신이 국무회의의 의결 없이 법령이나 포고를 재가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는 내용이었어요. 이틀 뒤에 프랑코는 두 번째 정부를 발표했는데, 군 장성과 고급장교들을 큰 폭으로 입각시켰습니다.
새 정부가 추진한 첫 번째 사업은 토지를 원래 소유주에게 돌려주는 일이었는데, 여기에는 1936년 혁명 기간에 몰수된 토지뿐만 아니라 공화 정부가 추진한 토지개혁에서 영향을 받은 토지도 포함되었습니다. 임금이 동결되었고, 파업은 불법화 되었으며 노동시간은 늘어났어요. 또 국가는 농산물 판매를 통제했고 가격을 동결하였습니다.
프랑코 정부의 이러한 통제 정책에도 불구하고 자급 경제체제의 수립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내전 기간에 독일과 이탈리아에 진 부채가 워낙 엄청났기 때문입니다. 독일에 진 빚을 갚기 위해 프랑코 정부는 1939년부터 1943년 사이에 국가 수입 총액의 12% 정도를 지출해야 했고, 이탈리아에 대해서도 3%를 지출하였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나라 전역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되었습니다. 임시 수용소를 포함해 190여 개의 수용소가 들어섰고, 36만 7,000명에서 50만 명가량의 포로들이 수용되었습니다. 국제여단에서 복무한 외국인 병사들을 수용하는 미란다데에브로나 산페드로데카르데냐 수용소 등 특별 수용소도 운영되었습니다.
프랑코 체제는 전시 상태를 벗어나면서 잔혹한 보복행위를 자행했어요. 1940년 4월26일에 제정된 탄압법들은 ‘1936년 7월18일 쿠데타 발생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적색 지역’에서 발생한 모든 상황에 대해 보복을 요구했어요. 법이 규정한 ‘책임의 귀속’은 ‘인민전선 내 여러 정당, 노동조합, 프리메이슨 단체 간부들의 물리적 파괴’와 ‘공화 정부를 후원하고 지지한 정치 세력의 절멸’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프랑코 정부가 저지른 보복행위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는 정확하게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스페인의 여러 주 가운데 약 절반 정도에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공식으로 처형된 사람만 적어도 3만 5,000명 정도였습니다. 여기에 비공식적으로 행해진 살인과 전쟁 중에 이루어진 처형, 자살, 굶주림, 옥사한 사람들까지 합치면 사망자수는 아마도 20만 명에 가까울 것으로 보입니다(Veevor, 2006: 405).
1940년 이후에는 프랑코가 독재체제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프랑코는 프리메이슨을 지독히 혐오하여 1940년에는 ‘반프리메이슨 특별정보부’를 설립했습니다. 1941년 3월29일 ‘국가안보법’이 채택되었는데, 이 법은 불법 선전, 파업 행위 등 범죄를 목적으로 한 결사행위, 체제에 불리한 소문 유포 등을 ‘군사반란’과 같은 행위로 보고 이러한 행위의 근절을 목표로 설정하였습니다. 1947년 4월에 제정된 ‘산적과 테러 근절을 위한 법’은 개인의 자유를 엄격하게 제한했어요.
한편, 고등 교육기관에 재학 중인 학생들은 ‘스페인 대학 연합’에 가입해야만 했습니다. 팔랑헤 노동조합인 ‘노동조합협의회(Organización Sindical)’는 막강한 권력을 소유하고 있었지만, 정작 노동자들의 권리 증진을 위해서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어요.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이 거의 군사적 규율에 따라 국가에 봉사하도록 하는 데 주력했죠.
스페인 내전 기간 중(1936~1938년)에도 세 차례에 걸쳐 공화군 19여만 명이 프랑스로 이주했는데,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다시 공화 진영 지역으로 돌아갔고 1938년 무렵에는 4만 명 정도가 프랑스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1939년 2월 카탈루냐가 함락되면서 공화군 45만 명이 프랑스 국경을 넘었습니다. 이들 말고도 공화군 1만 5,000명이 같은 해 공화 진영이 붕괴될 때 지중해 쪽 항구들을 통해 당시 프랑스 식민지이던 튀니지로 갔습니다. 전쟁에서 패한 공화 진영 사람들이 수용된 장소는 황량한 해안 지역이 대부분이었어요.
1939년 말까지 14만 명에서 18만 명 정도가 스페인으로 돌아가기로 선택했어요 . 약 30만 명은 프랑스나 다른 유럽 국가 또는 라틴 아메리카로 망명을 택했습니다.
스페인 공화 진영에 속했던 망명자들에게는 제2차 세계대전은 고달프고도 격렬한 내전의 연장이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많은 공화 진영 난민들이 공동의 적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 군대에 자원입대했습니다. 소련에서는 공화 진영 망명자들이 붉은 군대에 들어가 싸웠고, 비슷한 수의 사람들이 파르티잔으로 활동했습니다. 다른 많은 공화 진영 난민들은 프랑스 레지스탕스 부대나 프랑스 국내의 독일군에 대항하는 부대에 들어가 싸웠습니다.
1941년 6월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고 나서 에스파냐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스페인 독립 라디오’ 방송과 ‘툴루즈 라디오’ 방송을 통해 전국노동연합을 포함하여 스페인의 모든 공화 진영 세력을 반파시즘 전선으로 통합하기 위한 긴급회의를 제안하였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에스파냐전국연합(Unión Nacional Española)’ 이라 부르는 이 조직은 제14게릴라 군단의 주요 정치 부대가 되었어요. 그리고 1944년 프랑스가 해방된 뒤 에스파냐 공산당은 스페인 ‘재정복’을 위한 본격적인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