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었어요.”
영화 '또 하나의 가족' 제작위원회의 윤기호(36) 프로듀서가 해당 영화를 만들겠다고 나선 이유다. 윤 피디는 이어 “이 영화를 안 만들면 스스로 부끄러울 것 같았어요.”라고 덧붙였다. 영화 제작자에게 있어 대본, 소위 ‘작품’이 좋다면 그의 말처럼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 욕심을 내는 게 맞다. 영화를 제작하지 않는다고 부끄러울 이유는 없다.
그러나 이 영화는 좀 다르다. 제작 투자부터 난항이었다. 영화 제작비 마련은 촬영을 마친 현 시점에도 절반 정도를 갓 넘겼을 뿐이다. 시장논리대로라면 제작비 마련이 쉽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영화가 삼성 직업병 피해자와 그 가족의 입장에서 삼성과의 싸움을 그리고 있는데다, 독립영화가 아닌 ‘상업영화’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가족> 제작위원회의 윤기호 프로듀서 ©<또 하나의 가족> 제작위원회
대기업에 각 세우는 상업영화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지난 2007년 삼성반도체 기흥공장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을 얻어 23살에 세상을 떠난 고(故) 황유미 씨와 그의 아버지 황상기 씨에 대한 이야기가 바탕이 됐다. 고인은 삼성 직업병을 세상에 알린 첫 제보자다. 고인과 황 씨의 간절한 외침과 눈물겨운 싸움이 없었다면 삼성 직업병 피해자들의 억울한 사연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터다. 고인이 떠나고 6년이 흘렀다. 현재 삼성 직업병 피해 제보자는 181명이며 사망자만 69명에 달한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 법원 등을 통해 산업재해를 인정받은 이는 한 손에 꼽을 정도다. 그만큼 쉽지 않은 싸움이라는 것이다.
“소재가 소재인 만큼 다들 제작하기 어렵다고 했습니다. 사실 저도 김태윤 감독으로부터 같이 하자는 얘기를 듣고 미쳤냐고 했어요. 저는 상업영화 만드는 사람으로, 딴 영화로 대박 칠거라고 했죠. 그렇게 안 한다고 했다가 태윤이 형이 쓴 대본을 보고는 다음날 하겠다고 했어요.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었어요. 그리고 이 영화를 안 만들면 스스로 부끄러울 것 같았어요.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힘들 것 같았거든요. 대본을 보고, 아버님 이야기 듣고 감동했는데 애써 외면해야 할 이유, 현실이 있다면 앞으로 영화를 만들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 제작을 결심하고 윤 피디가 처음으로 한 생각은 “대기업 투자 못 받는다.”였다. 배급사부터 창업투자회사까지 대기업의 지원은 받기 힘들 것 같았다. 내로라하는 대기업 삼성이 영화 속 주인공들과 대척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기존 상업영화와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선택하게 된 것이 ‘크라우드 펀딩’(다수의 대중으로부터 소액 투자를 받아 자금을 모으는 방법)이다. 그렇게 <또 하나의 가족> 제작위원회는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인 ‘굿펀딩’을 통해 지난해 11월에 한 달 동안 1억 2천만 원을 모았다.
“당시에는 소셜 펀딩하며 영화 알리겠다는 복안이 있었어요. 또 영화에 공감하는 착한 자본가들이 이 영화에 투자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들어왔어요. 그래서 지난해 12월 초에 이 자금들을 묶어서 영화에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대선에서 야당이 패배했죠. 그 때문인지 다들 우리가 영화를 접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투자금 확보가 어려워졌죠. 그런데 당시는 이미 좋은 스태프들이 함께 하겠다고 하고, 배우들도 함께 하겠다고 한 상황이었어요. 11월에 투자금을 모아준 2071명의 시민들도 있었고요. 우리가 여기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고민했어요. 피디로서는 냉정하게 제작을 접어야 하는 것이 맞았고요. 그러나 마음이 안 움직이더라고요. 그래서 뜻을 함께 해 준 사람들을 믿고 더 달리자고 했습니다.”
힘겨운 시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대부분의 상업영화는 투자금의 70%를 확정짓고 시작한다. 반면 제작위원회는 10%만을 가지고 시작했다. 곧바로 2차 펀딩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영화 <26년>의 자체 모금기구인 제작두레 팀이 도움을 주겠다고 나섰다. 자신들의 성공 사례와 경험을 안고 가라는 것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소셜 펀딩으로 2억 5천만 원을 모으고, 이를 기반으로 개인 투자 3억 5천만 원을 모았다.
충무로 영화인들의 뜻을 모아
덕분에 지난 3월18일 촬영을 시작해 두 달여 뒤인 5월15일 무사히 영화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여기에는 영화 스태프와 출연 배우들의 공이 컸다. 특히 윤 피디는 황상기 씨 역할을 맡은 주연 배우 박철민 씨에 대한 고마움을 강조했다. 실제 인터뷰 도중 박철민 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배급 상황을 묻는 듯했다. 배급사가 정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걱정이 되지 않을 리 없다.
“고마운 사람이 철민이 형이에요. 배우한테는 이미지가 씌워지는 것이 치명적이라 캐스팅도 난항이 많았거든요. 주연배우 캐스팅 리스트가 많았어요. 고민도 많았고 사실 몇 명은 어려울 것 같다는 감도 있었어요. 그런데 철민 형은 흔쾌히 한다고 했어요. 대본을 준 다음날 오후에 바로 전화가 왔어요. ‘함께 가세’ 하고요. 알고 보니 철민 형 딸 덕분에 하게 됐다고 하더라고요. 딸이 대학교 1학년인데 형이 먼저 대본을 읽혔대요. 딸이 읽고 나서 ‘아빠, 이 영화 꼭 해. 그리고 괜찮겠어?’라고 했대요. 이렇게 철민 형이 합류해 윤유선 씨를 소개했어요. 이후 일사천리로 스태프를 모으고 캐스팅을 끝냈습니다. 마지막에는 김규리 씨가 합류했고요.”
이들 뿐만이 아니다. 배우 이경영, 정진영 씨도 출연한다. 윤 피디가 “우리 영화는 특별출연이 거의 없어요.”라고 강조했다. 이름만 들어도 누구나 알 법한 배우들이다. 대개 배우 출연료가 영화 제작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데, 영화 제작비도 다 마련하지 못한 영화가 어떻게 이렇게 인지도 높은 배우들을 모을 수 있었을까.
“배우들은 작품 선택할 때 우리보다 쿨해요. ‘대본 좋고, 작품 좋은데 왜 이걸 하면 안 돼? 이거 영화잖아’라며, 배우로서 욕심이 났다는 분들이 있었어요. 물론 많은 출연료를 드리지 못했어요. 대신 러닝개런티로 지급하겠다고 했죠. 그래도 매니저며 코디 등 촬영에 따른 진행비가 필요하거든요. 마땅히 드려야 했는데, 진행비마저 현물투자 하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촬영은 그렇게 진행이 됐어요.”
현물투자는 일종의 ‘러닝 개런티’와 비슷한 개념이다. 인건비를 책정해 놓고 그 비용을 영화에 미리 투자하는 것이다. 흥행에 실패하면 당연히 인건비를 받는 게 어려워진다. 손해를 감수하지 않을 수 없는 구조다. 그럼에도 뜻 있는 배우들 덕분에 무사히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영화 스태프를 모으는 ‘스태핑’ 과정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최영환 촬영감독처럼 뜻있는 충무로 영화인들이 가세해 영화의 완성도를 높였고, 현물투자를 통해 촬영을 마칠 수 있게 했다. 윤 피디에 따르면 <또 하나의 가족>의 촬영을 맡은 최 감독은 “몸값이 매우 비싼” 사람이다. 최 감독은 1억 원의 촬영 보수를 받기로 확정된 영화가 있었다. 그런데 <또 하나의 가족> 대본을 받고는 확정된 영화를 거절한 채 흔쾌히 동참했다. “개런티는 중요하지 않다. 하고 싶다.”는 것이 참여의 이유였다.
“저희 측에서 먼저 스태핑 제안을 했는데, 대부분이 오케이를 했어요. 저희도 놀랬죠. 영화가 가진 힘 때문이 아닐까요. 또 실제 있었던 일인데, 영화를 촬영할 때는 현장에서 매번 스태프들에게 촬영 스크립트를 나눠줘요. 그런데 제작 1회 차에서 조감독이 스크립트에 ‘우리가 이 작품을 왜 선택했는지 보여줄게’라고 썼더라고요. 감동 받았어요.”
사진 한 장을 보여주는 윤 피디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가득 차올랐다. ‘우리가 이 작품을 왜 선택했는지 보여줄게’라고 쓰인 스크립트를 찍은 사진이었다. 윤 피디가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현장은 재미있고 즐거웠습니다. 저는 스태프들에게 늘 ‘이 영화는 감독의 작품이자, 제작부 막내의 영화이기도 해’라고 말했어요. 일반 상업영화는 타성적으로 움직이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스태프들이 자기 영화라고 생각해서 만드는 동안 시너지가 장난이 아니었어요. 한 번은 촬영 감독이 촬영부 스태프들한테, ‘내 첫 상업영화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었어. 너의 첫 영화가 또 하나의 가족인 것이 평생 마음에 남을 거야’라고 했대요.”
“2라운드가 남았다.”
<또 하나의 가족> 촬영 현장 ©<또 하나의 가족> 제작위원회
영화가 갖는 함의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무사히 촬영이 끝났다고 영화 제작이 끝난 것은 아니다. 영화 후반작업과 배급사 선정, 홍보 등 남은 일이 산적해 있다. 윤 피디 역시 “이제 2라운드가 중요합니다.”라고 강조했다. 1라운드가 제작을 위한 사투였다면, 2라운드는 배급과의 사투다. 배급사를 정하지 못하면, 거칠게 말해 극장에 영화를 걸 수 없다. 그가 본격적으로 나설 차례다.
“다음 라운드의 주체는 저와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박성일 형입니다. 지금까지 모아준 힘, 진정성을 꼭 이뤄내고 싶습니다. 배급을 걱정하는 분들이 많은데 의외로 배급 제안이 들어오고 있어요. 투자, 배급사에서도 이 영화의 퀄리티에 확신을 가진 분들이 많거든요. 이 영화가 가진 함의, 관심도도 크게 작용하고 있죠. 7월 말 정도에 배급사를 대상으로 시사회를 할 계획입니다. <26년>도 배급사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제작에 들어갔어요. 우리도 우리 힘으로 영화를 끝냈고, 배급사 측에서 연락이 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원하는 곳까지는 아니어도 중소 배급사에서 콜이 많이 왔습니다.”
대형 배급사로부터의 러브콜을 기대하지 못하는 것은 역시 삼성 직업병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 지난 5월에 열린 제 15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는 삼성 직업병 피해자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탐욕의 제국>에 불만을 가진 삼성이, 영화제가 해당 다큐 제작을 지원했다는 이유로 지원을 중단한 사실이 알려져 파장이 일었다. 이에 삼성으로부터의 반응은 없는지 물었다. 아직까지는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나 메이저 배급사, 국내 스크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대기업 계열 영화관의 자기 검열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한다는 지점을 확대해야 합니다. 8월에 일반 관객을 대상으로 시사회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사람들에게 영화를 알리고, 티켓을 선구매 해달라고 할 거예요. 예를 들어 몇 십만 명이 우리 영화 페이스북에 ‘좋아요’를 누르면, 자본의 논리가 깨지게 되어 있어요. 극장에서 우리 영화를 안 걸 수가 없게 되는 거죠. 자본에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서는 명분, 즉 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높여야 합니다. 우리가 배급사를 왜 못 찾았냐면, 직접적으로는 없다고 하는데 그들이 자기검열에 부딪혀 있기 때문이에요. 또 삼성이 직접적으로 반응하지는 않아도 우리 영화를 불편해 하는걸 알고 있습니다. 걱정되고 겁이 나는 것도 사실이에요. 그래도 좋은 스태프와 배우, 두레 회원들이 힘을 모아주셨는데, 이 진정성을 꼭 이뤄내고 싶습니다.”
한국판 <에린 브로코비치>를 위하여
아울러 윤 피디는 <또 하나의 가족>이 노동, 산업재해처럼 무거운 얘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예요. 가족들의 이야기인거죠. 포커스는 유미 씨가 돌아가시고 난 이후 아버지가 딸의 산재를 인정받기 위한 과정에 있습니다. 일종의 한국판 <에린 브로코비치>죠. 요즘 우리 영화를 독립영화, 정치적 영화로 보는 분들이 많은데, 저는 휴먼드라마라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영화인이고 이야기꾼이지, 선동이나 구호를 외치는 사람이 아니거든요. 재미있고 좋은 영화예요. 또 작은 영화가 아니고, 한국 최초의 ‘산재 블록버스터’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산재나 삼성 직업병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봐도, 영화를 보고 난 뒤 ‘이런 일은 없어야 하는데’라는 생각이 들도록 마지막까지 잘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어 “우리가 하고 싶은 얘기를 하더라도 관객들이 봐준다는 것을 증명한 작품이 바로 영화 <부러진 화살>이다.”라며 <또 하나의 가족> 역시 성공할 거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또 하나의 가족> 제작위원회가 목표로 잡은 영화 개봉 시기는 오는 10월 또는 11월이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9월경 개봉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지만 제작 스케줄상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투자금을 마련하는 게 벅찼다.
“제작두레 참여가 더 필요합니다. 제작비를 다 마련했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아 촬영이 끝난 지금은 두레 참여가 소강상태예요. 현재 10억 중 6억 원을 모은 상태입니다. 앞으로 유료 시사회도 최대치로 할 테니 티켓을 선구매 해주십시오. 티켓을 많이 구매하는 단체에는 찾아가는 시사회를 할 예정입니다. 지금까지 잘 달려왔고 힘을 내서 왔으니 마지막까지 잘 달릴 수 있도록, 산재에 대해 정확히 인식할 수 있는 지점을 만들도록 주변에 많이 알려 주세요. 올 가을에 꼭 좋은 영화로 보답 드리겠습니다.”
제작두레 참여는 ‘또 하나의 가족’ 제작위원회 홈페이지(http://anotherfam.com)를 통해 가능하다. 인터뷰 동안 윤 피디가 가장 많이 쓴 단어는 ‘진정성’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도 “진정성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어요. 이 영화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으니, 자기 운명대로 걸어 나갈 것입니다.”라는 것이었다. 그 진정성이 어떤 반응을 이끌어낼지는 아직 미지수다. 이들이 마련한 밥상을 좀 더 풍성하게 채우는 일은 이들의 선택에 동감하는 적극적인 관객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