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보기] 이 폐허를 응시하라1)
작성: 윤자호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
저의 길티 플레저는 ‘인간의 잔혹한 본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잔혹한 본성’을 다루는 이야기 중 다수가 캐릭터들을 잔인하게 만들기 위해 많은 장치들을 쌓아놓기 때문입니다. 어마어마한 부자들을 위해 준비한 어마어마한 금액의 상금이 걸린 살인게임, 달리는 좀비 바이러스 대확산 속에서 고립된 상황 등이 그것입니다. 이러한 설정들은 모두 제도의 붕괴를 상정합니다. 그리고 공들여서 설정한 ‘극한의 상황’에서 창작자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처절함과 악’을 묘사하는데, 높은 확률로 폭력, 착취, 성적 대상화를 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실 세계에서 재난 상황이 닥쳤을 때 인간들은 어떻게 행동할까요? 레베카 솔닛의 ‘이 폐허를 응시하라’는 1906년 샌프란시스코 지진부터 1917년 핼리팩스 폭발, 1985년 멕시코시티 대지진, 2001년 911테러, 그리고 2005년 뉴올리언스 홍수에 이르기까지 아메리카 대륙에서 있었던 다섯 건의 재난과 그 이후 지역사회구성원들의 변화를 다룬 책입니다. 그리고 이 다섯 사례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재난 이후 사람들은 대부분 “이타심이 발동해 자기 자신과 가족, 친구와 사랑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타인과 이웃들을 보살피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한다(p. 10)”는 것입니다.
솔닛의 책에서 뿐만 아니라, 재난에 대한 연구에서는 재난이 닥치면 인간은 이기적으로 돌변하고 야만적인 모습으로 퇴보한다는 믿음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재난 상황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들은, 이러한 믿음을 근거로 타인의 야만적 행위를 막으려는 방어적 조치를 취하고 있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재난이 일어난 후 지역사회 구성원들은 반짝이는 기지와 따뜻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기꺼이 손을 내밉니다. 1906년 샌프란시스코 지진이 일어난 후, 미용사 겸 마사지사로 일하던 애나 아멜리아 홀스하우저는 작은 무료 급식소를 열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하루에 200~300명을 먹이게 됩니다. 홀스하우저의 급식소는 당시 자발적으로 시작된 많은 구호사업 가운데 하나였는데, 홀스하우저는 회고록을 통해 두려움・적・혼란・갈등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1917년 핼리팩스 항구 폭발 당시, 폭발을 피해 달아나던 몽블랑 호 선원 중 한 명은 생면부지의 원주민 여성과 그의 아기를 구하고 사망했습니다. 폭발로 인해 수많은 부상자와 사상자가 발생한 가운데, 부상을 입지 않은 주민들은 긴급구호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젊은 사업가 조 글루비는 자신이 운영하는 문구점 창문을 판자로 두르러 갔다가 끔찍한 참상을 보고는 중고 포드를 끌며 부상자들에게 왕진을 다니는 수의사의 운전기사 노릇을 했습니다. 이렇게 즉석에서 이루어지는 작업과 새로운 동맹, 그리고 새로운 규칙은 재난에서 지극히 일반적이라고 합니다.
솔닛은 재난에 대한 세심한 탐사를 통해 가장 절망스러운 순간 피어나는 연대와 희망, 그리고 삶의 회복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사유화의 원리가 인간의 삶 전반을 차지하는 오늘날이야말로 재난에 준하는 사태임을 상기시킵니다. 사유화는 공적인 것을 변덕스러운 시장에 맡기며, 우리가 서로를 보살피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각자도생과 적자생존을 마치 자연법칙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자연법칙이 아닙니다. 재난은 피해자들을 공적이고 집단적인 삶으로 돌아가게 함으로써, 사유화라는 재난에 제동을 걸기도 합니다.
『이 폐허를 응시하라』는 기지 넘치고 따뜻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점에서 영웅소설 같지만, 이 이야기들은 소설이 아니라 재구성된 사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알게 모르게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인간은 재난 앞에서 이기적으로 돌변한다’는 통념을 전면적으로 뒤흔듭니다. 그리고 그 통념의 자리에 ‘인간은 재난 앞에서 타인을 보살핀다’는 믿음을 새기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조금 즐거운 고민을 하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