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울산에 갔다 왔다. 민주노총 울산본부가 9월 23일 개최한 “1987년 노동자대투쟁 30주년 준비 2차 전문가 집담회” 참석이 목적이었다. 울산 상황은 예상보다 더 안 좋았다. 조선산업의 대량감원으로 실업률(’16.08)은 4.0%로 치솟아 2000년 4.8% 이후 가장 높은 수준으로 뛰었다. 경기 침체를 빌미로 한 현대차 자본의 총공세로 노조의 입지는 쪼그라든 상태였다. 교섭 초기부터 임금 동결, 임금체계 변경, 임금피크제 도입 등 이른바 3임을 들고 나온 자본은 노조를 압박하였고, 노조는 그룹사 공동 투쟁으로 맞섰다. 예년보다 늦은 8월 24일 노사 합의안이 도출되었으나 조합원들은 78.05%의 반대로 잠정합의안을 거부됐다. 노조는 ‘임금피크제 확대 완전 철폐’를 성과로 말했으나 조합원들은 낮은 임금인상율을 문제로 삼았다. 현대차의 교섭은 장기화되고 노조는 9월 말 타결을 목표로 전면 파업을 선언하여, 노사갈등은 비등점을 향하고 있다. 여기에 지진의 여진은 계속되어 민심마저 뒤숭숭한 상황이었다.
어쨌든 지역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87년 30주년 기념 준비 집담회가 열렸다. 민주노총 울산본부는 올 상반기부터 87년 노동자대투쟁(이하, 노대투)의 진원지였던 울산에서 노대투 30주년을 기념하고, 미래의 운동 과제를 조명하는 사업 계획을 논의해왔고, 그 일환으로 전문가 집담회를 개최한 것이다. 집담회 참석자는 민주노총, 학계, 노동연구자, 시민단체 등 4명이었다. 집담회는 참석자 당 15∼20분의 주제 발표, 질의응답, 상호토론 등으로 진행되었다. 집담회의 내용을 쟁점별로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현 노동운동의 진단이다. 참가자 모두 민주노조운동이 심각한 위기 상황에 빠져 있다고 진단하였다. 위기 진단의 원인 및 요인으로 낮은 조직률, 기업별노조 체제, 계급적 연대운동의 실종, 노동의 양극화, 정치세력화 실패 등이 꼽혔다. 이 결과 노동운동에 대한 사회적 지지의 약화 및 고립화가 나타나고 있다는 진단이었다. 노동운동의 위기야 오래전부터 지적된 상황이라면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전략은 무엇이며,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주체는 있는가라는 질문이 꼬리를 물었다.
둘째, 산별노조 건설,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대한 평가이다. 산별노조운동과 정치세력화는 노동운동이 추구해야 할 올바른 전략이었다. 노동운동의 양 날개 전략은 계속 추진되어야 한다. 다만 두 날개에 대한 인식 및 평가는 사뭇 달랐다. 산별노조운동은 리모델링이 필요하지만, 정치세력화는 원점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산별노조운동의 반성 지점은 무엇인가. 조효래교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재정자원, 인력의 집중에 의한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조직 효과는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기업별 노조체제의 낡은 유산도 여전하며 현장과 지역조직 역량은 거꾸로 약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노중기교수는 “산별노조가 계급적 연대전략이기 보다 정규직 조직노동의 경제적 이해를 수세적으로 방어하는 경제주의 전략의 일환으로 추진된 현실이 놓여 있다”고 말한다. 산별노조가 기업별노조의 양적 결합에 머물러 질적 전환을 하지 못했음에 공감했다.
반면 정치세력화는 과거에 대한 진단 및 평가 그리고 새로운 추진 방식에 대한 이견이 가장 컸다. 내년은 대선, 2018년은 지자체 선거로 정치권력의 향방이 결정되는 결정적 시기로 진보정당의 통합 및 재창당이 시급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 분열의 원인 및 민족, 계급 문제에 대한 기본 인식에 대한 논의 없이 진보정당을 재건설하자는 것은 맞지 않다. 적어도 노동현장에서는 대중들에게 진보정당 대통합 논의가 수용되지 않는 상황이므로, 늦더라도 진보정당간 연대 및 협의 틀부터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섰다. 함께 공유한 지점은 민주노총의 진보정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 방침은 잘못된 전략이며, 노동 현장의 정치의식 제고 및 정치적 토대 구축 없는 진보정당 건설의 맹점이 지적되었다.
셋째, 정책 역량의 한계와 취약이다. 민주노조운동에 대한 정권과 자본의 일상적 탄압이 있는 곳에서 투쟁을 통한 조직 유지 및 확대는 최상의 대응책이었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새롭게 변화하고 있는 산업 구조와 실업 확대, 고용형태의 다변화와 노동시장의 이중구조화는 노동조합의 대응 전략을 어렵게 한다. 이에 따라 민주노총의 정책역량 강화는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고 있으나, 여전히 중앙조직의 역할은 정책과 정치가 아닌 투쟁에 몰입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노조의 정책은 산업구조 및 고용형태에 대한 조응성이 취약하고 일반 대중들의 관심을 촉발하지 못하고 있다. 박명준은 한국노동운동의 취약한 인적 물적 자원에 따른 정책역량의 한계와 함께 민주노총 내부의 정책역량을 다음과 같이 진단한다. “내부적인 의사소통 제도의 취약, 그리고 아래로부터의 요구들의 불균등성과 총연맹에서의 조율의 실패, 리더십의 취약 속에서 정책형성 과정은 안정적이고 체계적이지 못하였다. 특히 총연맹의 지도부가 각 산하 단체들의 정책 지향의 차이를 조율하기보다는, 내부 단위노조 및 산별노조의 발언권이 총연맹보다 강하여 민주노총 산하 전체 조직의 정책 선호가 집결되기 힘들고, 조직 규모가 큰 산별노조의 주도에 의해 끌려가는 측면이 강하였다”고 말한다. 이렇듯 민주노총의 취약한 정책역량은 자원 결핍의 한계와 함께 민주노총에게 요구되는 위상과 역할에 대한 차이에서도 확인된다. ‘중앙조직-산별노조-지부(노조)’라는 3층의 조직 틀에서 각각의 조직이 갖는 위상 및 역할에 대한 조직 내 합의는 제 각각이다. 이 결과 민주노총의 역할은 지도부의 성향 및 외부 환경에 따른 갈 짓자 행태를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는 비판이다.
넷째, 문제 해결의 열쇠는 무엇인가. 상황의 엄중함, 노조 영향력의 취약 및 사회적지지 약화 등은 반복되어 왔던 노조운동의 문제점들이다. 누가 어떻게, 어떤 과정을 통해 이를 해결할 수 있는가가 핵심이다. 실패했지만 다시 조직 혁신 논의가 필요한 이유이다. 모든 집행부들은 조직혁신과 발전전략을 이야기했지만 그 효과는 긍정적이지 않았다. 민주노조 진영의 재활성화가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전략 부재에 있는가 아니면 이를 주도할 주체 세력의 문제인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현재는 두 원인이 중첩되어 있으며, 또 하나 쉽게 넘어가서는 안 될 지점은 과정 관리(process management)이다. 민주노총 정책대의원대회 파행 원인 중 하나는 대중조직에서는 조직혁신 논의가 어떻게 준비되고 추진되어야 하는가의 교훈을 제기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무엇부터 문제를 풀어나가야 할 것인가. 첫 출발은 일상적인 사업 진단과 평가의 내실화이다. 어느 순간부터 노동조합 조직 내 논쟁다운 논쟁이 없어지고 있다. 금속노조도 마찬가지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완성차 지부의 편제 문제를 놓고 전개되었던 수많은 논쟁은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산별노조에 대한 미래 전망을 놓고 전개된 논쟁이었다. 지금은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사회연대전략에 대한 깊은 토론은 없고 최저임금 1만원 총파업은 결의만 무성하다. 평가가 없다보니 현실 진단이 각각이다. 실천은 모아지지 않고 남은 것은 불신과 남 탓이다. 민주노총 정책대의원의 파행과 그 이후 전개된 위원장의 사퇴와 사퇴 번복은 우리의 민낯이고 현실이다.
둘째, 우리가 버려야 할 것은 조급주의와 한탕주의이다. 2017년 대선, 2018년에는 지자체 선거가 치러진다. 두 선거 결과가 향후 노동운동 및 한국 사회의 미래를 결정짓는 분기점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한 노동운동과 진보정당의 역할이 중요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바늘허리에 실을 메어 쓸 수는 없다. 준비되지 않는 투쟁, 토대 없는 진보정당의 건설은 조급주의의 반복이다. 한 번의 투쟁으로 노동시장 구조나 노사관계의 기본 틀이 바뀔 수 없는 상황이다. 작은 성과들이 모여, 큰 변화를 일으킨다. 모범을 만들고 혁신적 대안을 창출해야 한다. 관성적인 활동은 쉽지만 우리의 토대를 갉아 먹는 구태이다. 87년 30주년을 맞이하는 우리는 무엇을 슬로건으로 싸워 나갈 것인가. 노동해방의 현대적인 구호는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셋째, 기업별체제의 상징인 공장 담벼락 뛰어넘기이다. 분열은 자본의 논리이고 연대는 노동의 철학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 민간과 공공부문, 여성과 남성노동자의 구분은 자본 지배를 유지하기 위한 갈라치기 전략이다. 이에 맞서는 노동의 전략은 연대와 공동체의 실현이다. 이를 위해 산별노조는 재구성되어야 하며, 기업별노조의 상징인 공장 담벼락을 뛰어넘는 교섭구조와 조직 활동을 구축해야 한다. 기업 노동조합은 한국을 포함하여 일본과 동남아 일부 국가에서 볼 수 있는 변칙적인 조직 형태로, 노동조합(union)의 정의 자체와 충돌한다. 노동조합이란 자본과 국가와 구별되는 노동자들의 자주적인 사회다. 기업, 국가에 예속되지 않으면서 이들에 맞서 대항력, 교섭력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자면 기업 경계 더 나아가 국경까지 넘어선 독자적인 조직 범위 그리고 그에 따른 정체성과 일상 활동을 갖춰야 한다. 그런데 기업 노동조합은 노동조합의 이러한 본분에 위배된다. 애초부터 기업 간 구획에 스스로를 맞추기 때문이다. 이런 노동조합은 기업이라는 기성 ‘사회’에 갇힌 그 하부 구성 요소가 되고 만다. 이를 넘어서고자 했던 노력이 산별노조운동이다. 하지만 산업노동조합운동은 신자유주의의 노동자 분할 책략에 추월당해 버렸다. 이제 산별노조는 산별교섭의 촉진을 통해 연대임금 및 고용정책을 실현해야 한다. 연대는 차별을 해소하고 공동의 이해관계를 구축해가는 집합적 노력이며, 계급 형성(class formation)의 또 다른 전략으로 자리 매김 되어야 한다. 또한 노동인권의 사각지대에 방치되어 있는 90%의 노동자들의 보호를 위한 단체협약 효력확장 제도의 개선 방안이 추진되어야 한다.
넷째, 계승할 것은 변혁성과 낙관주의적 관점이다. 30여 년 전 6월 항쟁과 노대투는 한국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꾼 변혁의 과정이었다. 변혁은 사회의 변화와 함께 우리들의 의식과 태도, 행위 양식까지 바꾸었다. “1987년 7.8.9월 노동자대투쟁은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그리고 가장 큰 규모로 이뤄진 노동자들의 대중적, 계급적 진출이었다. 1987년 여름 전국을 뒤흔든 이 외침은 그동안 한낱 기계의 부속품으로밖에 취급되지 않았던 노동자들의 ‘인간선언’이었고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대중적 부활이었다. 투쟁은 단결의 무기인 민주노조를 구축해냈다. 민주노조는 천만 노동자의 생명이었다”. 이제 1세대 노동자들이 이루어낸 성취와 한계는 원하든 원하지 않든 2세대 노동자들에게 넘어갔다. 1세대가 만든 “노동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역사적 웅변은 새로운 변혁적 요구로 바뀌어야 한다. 산업현장의 ‘노사공동결정제도’, 35시간 노동시간제, 노동의 인간화가 그 기초가 될 것이다. 사회 구조적인 개편은 ‘노동존중의 사회” 만들기가 목표이고 이를 위해 ’차별 없는 노동시장, 사회연대적 노사관계, 보편복지의 공공공성 강화’가 그 기둥이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미래의 30년은 주어진 결과물이 아닌 우리가 만들어 낼 헌신과 노력의 땀방울로 결정될 것이다. 인간 역사의 발전과정과 노동의 역사를 볼 때, 역사는 일시적으로 후퇴하기도 하지만 길게 보면 발전해 왔다. 어려운 시기를 견뎌낼 수 있는 힘은 역사적 낙관주의에서 비롯된다. 셀리나 토드의 『민중 : 영국 노동 계급의 사회사 1910-2010』은 다음과 같이 민중의 삶과 미래를 이야기 한다.
“20세기의 진정한 성취는 그들 자신의 삶에 대한 더 많은 결정권을 추구했던 보통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 통상적으로 그들은 성공에 대한 큰 희망을 갖지 않은 채 무언가를 변화시키는 일에 착수했지만 종종 변화의 속도는 용기를 북돋아줄 정도로 급격했다. (…) 과거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민중이 더 나은 미래를 원한다면, 우리가 그것을 우리의 힘으로 만들어낼 수 있고 만들어내야만 한다.”
*9월 26일 금속노조 노동연구원에 기고한 칼럼입니다.